(2954) 개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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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00년 10월 3일 관립 중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학교위치는 서울 화동, 교사는 교장이하 7명, 학생은 85명이었다.
학생모집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관립학교였기 때문에 정부는 9월 11일자 관보에 학생모집 광고를 2주일간 게재했다.
「관립 중학교 학원권부 광고」라는 제목으로 된 모집요강은 다음과 같았다.
『금에 관립 중학교 학원을 모집할터이니 입학하기 원하는 자는 본월 25일내로 품청증을 본부로 구정하고 이일에 본부에 내하야 입학시험에 응할사.
시험과목
1. 국문-독서·작문·사자
1. 한문-독서·작문·사자
1. 산술-문대
1. 역사-문대
1. 지지-문대
입학자의 연령은 17세 이상으로 25세까지.
품청서는 본부로 내하야 구용할사.
중학교 관제와 규칙이 공포된지 1년 5개월이나 지난 뒤에 학생을 모집하게 된 것은 학교문을 열기에 앞서 갖추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개교 준비기간 중 김각현과 이필균 두 사람이 차례로 학생없는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개교 준비작업을 해냈다.
특히 위조가 혁파되어 학부 아문으로 개편되었다가 학부로 바뀌었을 때 이곳의 학무국장을 맡고있던 김각현은 이 관립중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겸임 발령을 받아 개교 1주일전까지재임하면서 학교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교지는 몇해전 경기 고등학교가 서울 강남구로 이사하기 전까지 있던 서울 화동 바로 그자리에 마련되었다.
북악을 등지고 삼청골을 끼고 내리달리면서 도읍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록에 대지 3천50여평이 점지되고 이곳에 1백여평의 단층교사가 건축되었다.
이곳은 당시 홍현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단층교사는 갑신정변 때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개화파 서재필의 빈집을 개수한 것이었다.
「쿠데타」후 3일천하만에 망명한 서재필의 집은 정부에 몰수되어 있었다.
워낙 대가집이었던 까닭에 일자행랑채에 방이 여남은개나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게해서 드디어 학생모집까지 하게되었으니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름이야 중학교라고는 했지만 우선 신식학문을 배워보자는 생각을 가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해도 관전민비 사상이 지금보다 더 심했기 때문에 관립학교를 나오면 관청에 들어가 출세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가긴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입학시험에는 지방각처에서 올라온 젊은이들이 응시했다.
함경도·평안도에서도 올라왔다.
본래 중학교 관제 및 규칙에 규정된 입학자격자는 심상과(3년)와 고등과(3년)로 짜여진 소학교의 고등과를 졸업한자로 되어 있었으나 실체로 이것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관립중학교 입학시험이 실시된 해 7월 10일에. 소학교 졸업식이 있었는데 서울의 관립소학교 고등과 졸업생은 15명에 불과했다.
관립중학교 첫 입학시험에 합격한 이능우(1회 졸업생·별세)의 경우를 보더라도 소학교에 가게된 것이 재동 근처에 심부름을 가다가 길에 나온 선생님들에게 잡혀 머리를 깎이고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는 정도였다.
당시만해도 완고했던 때라 자식을 서당이 아닌 소학교에 보내려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해 중학교 규칙도 중학교 입학자격을 고등 소학교 졸업자, 만 17세이상 25세이하인자, 신체강건자로 규정하면서도 『현금간만 각 외국어학교 졸업생과 문필이 초유하고 재치가 총명한자를 특별히 허입훈을 득훈이라』고 예외규정을 둘 수밖에 없았다.
입학자의 연령제한도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다.
25세 이상의 연장자·장가 간 애 아버지도 입학해 생도와 선생의 연령이 서로 비슷한 경우도 있었다.
비록 나이가 다르고 교육정도에 차이가 나고 출신성분이 틀리더라도 이들 방명의 첫 입학생을 맞아 「관립중학교」라는 명칭으로 경기가고고의 소리를 울릴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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