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장두성 특파원|"당신들 중 누가 미 CIA 첩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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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란」인으로는 키가 큰 편인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당신들 중 누가 미국CIA에 정보를 제공하는 첩자인가』라고 묻는다.
기자는 이때 인질문제를 토의하는 「이란」의회「마즐리스」정문 앞에서 「스웨덴」의 한「라디오」방송기자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보도하면 아마 미국의 교관들이 듣고 참고로 본국에 보고할지는 몰라도 기자가 왜 첩자질을 하겠는가』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외국기자가 인질이 숨겨진 곳을 탐문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틀림없이 미CIA첩자가 이중에는 있다며 둘러선 7O여명의 외국기자들을 가리 켰다.
『나라도 인질들이 있는 곳을 알면 찾아가「인터뷰」를 시도하겠다』니까, 그는 기자를 유심히 쳐다본다.

<人質탐문할까 의심>
『「테헤란」방송도 CIA가듣고 자료로 삼을텐데 그럼 「테헤란」방송을 C1A첩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옆에 있던「스웨덴」기자가 거들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모사데크」의 축출에서 시작해서「샤」의 학정, 그리고 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거의 강박관념처럼 되어서인지 외국기자에 대한 이런 투의 반감은 상당히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침략을 당했으면서도 국제여론이 침략자인 「이라크」를 규탄하지도 않고 「이란」에게 동정적이지도 않은 묘한 서방측의 반응·자극을 받았는지 최근에는 「호메이니」가 공보생 고위관리를 불러 외국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최고국방회의도 대외 홍보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일반화된 외국기자 기피층은 변함이 없다.
혁명 후 중간 관리층이 와해된 행정공백 때문에 상부의 지시가 적절히 하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사당도 촬영금지기자가「테헤란」에 도착하던 날「라자이」수상은 자기의 최근「유엔」방문에 관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런데 외국기자를 주 대상으로 한 이 회견공고를 그 전날 「테헤란」의 「페르시아」어로 방송했다.
외국기자를 위한「프레스·센터」가 있지만 거기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서 여러 기자들이 이 회견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은「테헤란」에서의 취재는 현지인을 사용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되어있다.
「호메이니」가 연설을 하건 의회가 긴급회의를 열건 아무도 공식으로 통고해주는 사람이 없고 의회에는 버젓이 공보관이 있지만 여기 모인 외국기자들은 최근 한번도 그를 만난적 조차 없다. 「이란」인들은 자기들의 어려움에 대한 외국인들의 몰리해를 탓하지만 외국언론에 대한 「이란」인 자신의 피해의식이 그런 몰이해의 가장 큰 원인이란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데즈풀」전선에서 한 「덴마크」사진기자는 멋진 사진을 하나 찍었다. 혁명재판소 소장으로 이름난「할할리」가 기관단총을 손에 쥐고 이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그런데 찍자마자 옆에 있던 군인이 「카메라」를 빼앗았다. 촬영금지대상을 찍었다는 것이다.
결국 「할할리」자신이 『내가 무슨 비밀무기인가』라며 「카메라를 돌려주도록 지시해서 이 사진기자는 「필름」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의회 앞에서 한 「캐나다」기자는 산회하고 나오는 의원을 찍다 사진기를 빼앗겼다가 「필름」만 뺏기고 후에「카메라」를 다시 돌려받았다. 이에 앞서 본 기자도 의사당 앞에 늘어선 승용차를 찍으려다가 잠시 「카메라」를 빼앗겼었다.
단파라디오가 필수
다행히 옆에 섰던「이란」인 두 사람이 「셔터」 소리가 나지 않았음을 증언해준 덕에 본 기자는 무사했다.
문제는 의사당이 촬영금지구역이란 표지가 없고 그 전날만해도 마음대로 찍도록 허용됐었다는 사실이다.
취재활동에 어떤 규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고 알더라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런 보장이 없는 악 조건 속에서 기자들은 미국인들이 심어놓은 불신과 혐오감의 피해를 톡톡히 보고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 공보성 직원에게 기사검열 관계를 물었을 때『검열은 없지만 동료기자들에게 자세한 것을 물어 보라』고 하던 수수께끼 같은 답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차차 알 것 같았다.
「이란」에서 취재하는 외국기자에게 필수적인 것은 단파「라디오」와 현지인 통역과 개인용 승용차다.
얼핏 호화판 취재 같지만 「뉴스」가 자유롭지 못한 현지 상황에서 영국 BBC방송과 「미국의 소리」방송(VOA) 없이는「이란」내의 소식도 잘 알기 어렵다.
의사당 앞에서 통역 없이 서 있다가 나오는 의원을 잡고 영어로 『오늘 무슨 결정이 있었느냐』며 여러 번 물어본 적이 있다.
모두들 외면하고 지나 가는데 한 의원이 정확한 영어로 『나는 몰라요』라고 말하고 휙 지나가 버린다.
옆에 개라도 있었더라면 힘껏 차고싶은 심정이었다.
「테헤란」에서는 자가용차 사용이 통제되고 있어서「택시」는 모두 합승으로 운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정「코스」외에는 탈수가 없다.
택시는 모두가 합승
한번은 차 없이 나가 다가 하오5시를 맞아 혼난 적이 있다.
합승「택시」를 타려면 행선지쪽 길을 찾아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예컨대『영등포』 또는 『잠실』 이라고 소리쳐야 되는데 노선을 알길 없는 기자는 행선지인「호텔」이름만 불러댔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등화관제 때문에 6시 후면 길을 알아도 차가 가기가 힘들게 된다. 이 큰 도시에서 다시 노숙을 해야될지 모른다는 절박감 때문에「택시」를 포기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1시간 걸려「호텔」을 찾아갔는데 그때에는 이미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전쟁하는 나라의 취재란 원래 어려운 법이기는 하지만「베트남」전쟁처럼 가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상적인「후방」이 없고 저녁5시부터는 암흑 속에서 아무런 활동도 못하고 갇혀있어야 하고「이란」관계자들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취재는 좌절감의 연속이고...
그래서 지극히 이기적 이유에서 기자들은 서로 만나면 언질문제고 전쟁이고 하루 속히 끝나줬으면 하는 말을 인사처럼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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