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938)제70화 야구에 살다(37)군 야구팀 창설|김영조<역자=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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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군 야구 「팀」의 태동은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2월 공군 「팀」의 창단으로 비롯됐다. 공군 「팀」의 산파역은 나와 함께 식은·금련에서 야구를 같이한 허곤 소령(당시)이었다. 허곤은 49년 가을 금련을 사직하고 공군사관학교와 공군대학을 거쳐 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다.
허곤은 전쟁이 한창 때이지만 야구 「팀」을 창단함으로써 군 사기앙양과 야구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참모총장이던 고 최용덕 중장에게 건의하자 야구에 관심이 많던 최중장이 이를 받아들여 쉽게 이뤄진 것이다.
공군 「팀」의 창단으로 한국야구는 처음으로 군 야구 「팀」 탄생이란 새로운 역사가 이뤄졌다. 공군야구 「팀」은 부장에 인사국장 김득룡 대령을, 감독에 동래고보 유격수였던 윤천주 중령(전 서울대총장), 「코치」 겸 주장에 허곤 중령, 주무에 군의관인 최효종 소령(현재 서대문소아과병원장) 등으로 「스태프」를 결정하고 이기역·최은직·김홍일·김창기·정태수·송왕창·조성일·박창남·정만오·주세현 등을 하사관 혹은 소위로 임관, 「팀」을 구성했다.
공군 「팀」은 대구시 칠성동 종합운동장에서 훈련을 쌓았으나 상대 「팀」이 없던 차에 허곤이 이웃 부대인 육군 화학감실에 배속된 명 투수 한태동 중위를 만나 육군야구 「팀」 창단을 권유했다. 중앙고보에서 투수를 한 한태동은 경성치전(서울치대전신)을 거쳐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육군은 이때 산하 단위부대에 야구 「팀」들이 있었으나 공식경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침 화학감인 김태봉 대령이 신의주고보 야구선수 출신이어서 육군 「팀」의 창설은 순조로왔다.
한태동이 주축이 된 육군 「팀」은 장태영·허종만·황기대를 제외하곤 무명의 30대 영관급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53년 4월 칠성동 종합운동장에서 육군-공군의 친선경기를 벌이게 됐다.
이날 6천여명의 관중이 들어찬 가운데 벌어진 친선경기엔 공군편대기의 축하 저공비행으로 대구 시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야구계 원로인 윤재준(고인)과 영남체육회 박만태 이사가 화환을 양 「팀」에 전달하며 축하해 주었다. 이듬해 2월 허곤은 야구협회 이영민 이사장(현 전무이사)과 협의, 서울 수복기념 육·해·공군의 3군 친선야구대회를 4월 서울운동장에서 벌였다.
3군 친선 야구대회를 계기로 해군은 진해에서 「팀」을 급조, 전력이 가장 약했다.
이 대회엔 손원일 국방장관이 「컵」을 내놓아 더욱 빛을 냈으며 당시 공군군악대 하사관으로 복무중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공군응원단장으로 나와 성대모사 등으로 첫 선을 보였다.
이 대회에서 공군은 일방적 승리로 우승했는데 육군은 이때의 참패에 자극을 받아 55년 1월 이효 준장(전 대한체육회의장)이 야구부단장에 새로 취임, 「팀」 강화에 나서 김일배를 감독으로 초빙하는 한편 박보식·김정환·박상규 등을 「스카우트」하여 이후 한국야구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육군은 56년 용산에 야구전용인 육군야구장을 건립, 한국야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주었다.
한편 해군야구 「팀」은 이보다 늦은 56년에 국방부에서 군 「스포츠」 강화를 지시, 경성부청과 체신국에서 야구를 한모무설(야구협회이사)을 감독으로 맞아들여 3월에 정식으로 「팀」을 창단했다.
당시 대학 최강 「팀」인 성균관대의 이팔관·박진원·이필균·이용귀, 인천출신으로 통운 「멤버」였던 유완직·이덕영·박근직·심연택, 부산출신의 김계동·이수대·백기수 등을 모두 장교 혹은 문관으로 우대하여 「팀」을 구성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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