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5)제 70화 야구에 살다(34)중학야구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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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금융조합련합회에 들어간 것은 48년1월이었다. 이해부터 부침이 심했던 실업 「팀」들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실업「팀」은 6∼7개 「팀」으로 줄었으며 금련은 중앙실업의 주축이며 경기고 감독인 오윤환을 새 감독으로 맞아들이는 등 전력을 크게 보강했다.
금련은 특히 광주출신들을 많이 「스카웃」, 후에 광주일고감독을 한 심량섭(1루수)홍병창(좌익수) 장종기 (투수) 이기역(3루수) 허곤 (중견수) 남궁용(우익수) 임형관 (2루수) 김홍수(유격수)와 대표감독을 역임했고 암으로 타계한 김계현(유격수)등이 주전을 이루었다.
「라이벌」인 조선통운은 인천출신들로 대부분 구성, 유완직(투수)인식 (1루수) 형제, 강대중 (유격수)박지덕(투수겸 우익수)장석화 (포수) 박근식 (3루수)심련택 (중견수) 박점도(2루수)정관칠 (좌익수)등이 활약했다.
두 「팀」은 항상 결승에서 맞서 명승 부를 연출했는데 응원에서도 대조를 이 금련은 농악을 듣고 나온 반면 통운은 「밴드」를 동원했다.
금련은 경기가 있는 날엔 야구에 이해심이 깊은 하양용 부회장이하 전 직원의 절반인 4백여 명이 막걸리를 한 대접씩 들이키고 응원에 나서 농악으로 흉을 돋웠는데 한때「매스컴」에서 금련 직원들은 야구응원 때문에 일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특필, 문제가 된 일이 있기 까지 하다.
특히 이 당시 민족지도자인 김구선생과 김규직 박사가 본부석에서 구경한 것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두 분은 옷이 대조적이어서 김구선생은 한복을 입은 반면 김규직 박사는 양복을 입고 나와 대조를 이뤘다.
여기서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빚어진 6·25로 야구의 수난사를 잠깐 제쳐놓고 해방 후「붐」을 일으켰던 중학야구 (현 고교야구)를 빼놓을 수 없겠다.
중학야구는 46년에 창설된 전국중학야구 선수권대회(현 청룡기)와 이듬해 만들어진 지구별 초청 중학야구대회(현 황금사자 기)로부터 비롯됐다.
중학선수권대회는 자유신문편집국장인 이정순의 공로로 창설된 것이다. 이정순은 이영민과 배재·연전의 동기동참으로 야구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그는 일본에서 가을에 열리는 갑자원대회를 모방, 신문확장을 겸해 이 대회를 창설한 것이다.
이어 이듬해 만들어진 지구별 초청대회는 일본의 매일신문이 3월에 개최하는 대회를 흉내낸 것이다.
이 당시 발군의「스타·플레이어」는 단연 장태영(경남중)박지식(동산중) 김양중(광주서중)등을 들 수 있다고 김양중은 제4회 중학선수권대회(49년)에서 당시 난공불탁이라던 경남중을 깨뜨리고 우승하는데 투수로 수훈을 세워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때 최강「팀」은 「사우드·포」장태영이 이끄는 경남중으로 중학선수권대회에서 2연패(47∼48년).지구별 초청대회에서 3연패(47∼49년)를 기록하는 등 6·25전까지 초 중 학급 「팀」으로 화제가 됐다.
전성기 때 경남중의「스타팅·멤버」는 1번에 최근 야구협의전무이사가 된 허종만(중견수)2번 정상규(2루수)3번 장태영(투수) 4번 조생일(3루수)5번 황기대(좌익수)6번 정태수(1루수)7번 송주창(포수)8번 박정표(유격수)9번이상재 (우익수) 등이었다. 「에이스」장태영의 「볼」은 하도 빨라 전조선 장종기 투수의「스피드」를 능가한다는 평이었다. 경남중은 48년12월 「하와이」원정(결국 무산)을 앞둔 전조선군과 대견한 일까지 있었는데 경남중이 l-0으로 패하기는 하였지만 장태영은 10개의 삼진을 빼앗아 중학투수로 극찬을 받았다.
경남중은 48년 제3회 중학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휘문중을12-0으로 대파했는데 장태영은 9회까지 삼진 18개에 최소투구횟수인 79개를 던져 당시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경남중이 서울의 강호들을 제치고 전국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부산이 야구가 활발한 일본과 가까와 지리적인 혜택을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데 선수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 기본기가 충실했다.
장태영의 집은 목장을 경영하는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시즌」때는 동료선수들이 몰려들어 합숙소를 방불케 했다.
또 초대 시의원을 역임한 그의 무친(장인달)은 경남중 야구부 후원회장으로 열의가 대단했다. 장태영은 15세 때인 중학2학년매 제1회 중학선수권대회(46년)애 처음으로 전국무대에 등장했는데 유격수였었다.
장태영을 본 야구원로 이원용이 왼손잡이 유격수는 1루송구 때 「투·모션」을 취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고 충고, 이듬해부터 투수로 전향한 것이 크게 각광을 받게된 동기가 됐다.
6·25전 중학야구 최대의 명 승부는 제4회 중학선수권대의 결승에서 대결한 경남중과 광주서중의 역전 「드라머」다.
이 야구사에 남는 기적 같은 역전 극은 똑같이 왼손잡이인 장태영과 김양중의 대결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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