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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9)제70화 야구에 살다(28)일 도시대항 대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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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형민이 일본 「프로」 야구 입단교섭을 받았을 당시 경성엔 식산은행(이영민·노정호)을 비롯하여 경성부청(김정직·이경구) 체신국 (김영석·오윤환) 철도국 경성전기 등 5개 실업「팀」이 있었는데 거의 일본인들이 주축을 이루고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형민은 활동무대가 넓은 일본「프로·팀」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이형민은 연전시절부터 존경하게 된 유억겸학감을 찾아가 의논했다. 유학감으로부터 일본「프로」야구가 초창기여서 기업으르 성공할지 미지수이니 가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일본「프로」행을 단념했다. 지금도 일본 「논·프로」야구의 최고 권위대회는 도시대항대회와 동경 6대학「리그」다. 흑사자기를 다투는 도시대항대회는 1927년에 시작됐다. 일본 본토에서 13개「팀」,그리고 조선·대만·만주대표 등 모두 16개「팀」이「토너먼트」로 패권을 겨루었다. 조선대표는 경성을 비롯, 간양·신의주·부산·대전·대구·함흥 등 7개 선발 「팀」 중에서 한「팀」이 대표가 되는 것인데 경성 「팀」은 5개 실업 「팀」에서 뽑은 선수들이라 다른시보다 실력이 두드러져 대부분 조선대표가 되었다.
1933년 전일본 도시대항대회에도 식산은행을 주축으로 한 전경성「팀」이 참가했다.
전경성은 이해에 처음으로 대망의 결승에 올라 6대학 출신으로 구성된 동경구락부와 결전을 벌이게 됐다.
당시 동경구락부에는 2차대전 후 일본「프로」야구를 주름잡은 「미하라」(삼원·전서철감독)와 장동·백인천을 동영시절 지도했던 유명한「미즈하라」(수원)등 당대의「스타」들이 주전을 이루고 있었다.
전경성은 최후의 결전인 동경구락부를 맞아 뜻밖에도 유일한 조선인인 이형민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전경성은 이영민이 8회까지 완투하면서 동경구락부의 강타선을 4안타 1실점으로 막는 한편 타봉에 불이 붙어 4득점, 마지막 9회말만 넘기면 패권을 차지하는 감격적 순간을 눈앞에 두게됐다.
그렇지만 천추에 한을 남긴 9회말 2사후의 역전「드라버」가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예측했을 것인가. 이 경기의 마지막 극적인 순간은 국내 고교경기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9회초까지 4-1로 뒤지다 9회말 5-4로 뒤엎은 것과 너무나 양상이 똑같아 흥미롭다.
이영민은 9회말 2사까지 범타로 요리, 마지막 한 타자만「아웃」 시키면 꿈에 그리던 패권을 차지하게되어「덕·아웃」은 물론, 대부분 조선유학생들인 응원단들마저 들뜨기 시작했다. 거의 패색이 짙은 동경구락부는 마지막 타자로「와세다」(조도전)대 출신의 「야노」(시야)를「핀치·히터」로 내보냈다.
이영민은 쉽게「투·스트라이크」를 뺏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영민은 「스트레이트」 삼진으로「야노」를 잡아 멋진 승리로 장식하겠다는 영웅심이 발동한 것이 탈이 되었다. 한복판 직구를 던지자 6대학 「리그」에서 한 몫하던 「야노」는 중전안타를 날렸다.
「덕·아웃」에서 야유가 쏟아지자 오기가 난 이영민은 계속속구로 승부를 내려다 연속3안타를 맞고 2점을 뺏겨 4-3으로 쫓기면서 주자를 1,2루에 두었다. 들끓는 장내의 아우성 속에 2번「미즈하라」에겐 신중히 대결, 「볼·카운트」2-3까지 끌고 갔으나 결국 사구로 드디어 만루의 역전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때 경성감독은 이영민에게 「마운드」에서 내려올 것을 명령했으나 『이 경기는 내가 끝내겠다』고 고집했다.
이영민은 3번타자에게 또 우익수 앞 안타를 맞아 2루 주자까지「홈인」,5-4로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전경성 선수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고 동경구락부 선수들은 길길이 뛰면서 운동장을 돌았다.
그러나 경성「팀」이 역전패는 했지만 이영민은 크게 인정을 받아 이듬해 일본에 원정을 미국 「메이저·리그」선발 「팀」과 대결할 전일본「팀」에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뉴욕·양키즈」의 「베이브·루드」 와 「루·게릭」 등 강타자가 포함된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 「팀」은 전일본「팀」을 연파했는데 이형민은 외야수와 「핀치·히터」로 기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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