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중단·서울의 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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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남북대화가 또 다시 중단됐다. 북한은 남북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26일의 11차 실무접촉을 불과 이틀 앞둔 24일 평양방송을 통해 접촉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또 북한은 아무런 사전 통고없이 25일부터 남북직통전화 역시 받지 않고 있다.
이로써 그 동안 가냘프게나마 이어져온 남북대화의 통로는 또 한번 막혀버리고 만 셈이다.
북한의 이같은 일방적 대화중단에도 불구하고 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우리측 실무대표는 26일 남북한간의 긴장완화와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6개항을 제의했다. 이 6개항은 첫 남북총리회담을 오는 11월3일∼8일 사이에 열자는 것과 회담장소로는 기왕에 합의된 대로 판문점 자유의 집이나 판문각, 또는 서울·평양 중에서 북측이 희망하는 장소로 하자는 것, 그리고 남북직통전화 2개 회선은 앞으로도 중단 없이 계속 운용하자는 내용 등이다.
아울러 쌍방간에 오랜 기간 의견대립을 보여온 총리회담의 의제문제는 더 이상 실무접촉에서 논의할게 아니라 쌍방 총리들이 직접 협의, 결정케 하자는 것이다.
이 6개항의 제의는 약 8개월에 걸친 쌍방의 실무접촉에서 풀지 못한 총리회담의 의제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문제를 선대좌·후토론으로 해결해 보려는 우리측의 간절한 성의가 내포되어 있다.
가령 회담장소를 북측이 원하는 대로 하자든가, 의제는 총리들이 직접 만나 결정케 하자든가, 또는 직통전화를 계속 유지하자는 등의 제의내용을 보면 어떻게 하든 대화의 통로를 유지하고 총리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자는 우리측의 평화 지향적인 자세가 역력히 드러나는 것이다.
북한이 늘 대외적으로 고창해마지 않듯이 진정 평화통일과 대화에 의한 문제해결에 뜻이 있다면 우리측의 이 제의를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며 이 제의대로 총리회담의 개최에 응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남북한간에 긴장이 존재하고 풀지 못한 문제가 산적한 터에 전화와 같은 최소한의 접촉이나 대좌 그 자체마저 외면하려 드는 것은 곧 문제의 평화적 해결보다는 무력에 의한 해결을 노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 외에 다름 아니며, 그들의 대외적 평화위장 속에 호전적 실체가 도사리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이번 총리회담의 경우 그들이 먼저 제의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대내외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논리로 일방적으로 대화중단을 선언한 것은 무슨 말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측의 이번 제의에 북한이 호응해올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김일성이 접촉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우리는 당분간 한국정세를 지켜볼 작정』이라고 말한데서도 명백하고 그들이 남북대화에 임하는 자세를 보더라도 분명하다.
북한이 대화에 응하는 것은 대화 자체를 통해 문제해결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대남공작의 한 수단으로 대화가 유효하다고 판단될 경우 만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대화를 대남적화 혁명전략을 위한 하나의 전술로 이용하고 전술로서의 가치가 없으면 언제라도 팽개치는 것이 상투적 수법이다.
「대화전술」로 우리의 내부를 그들 나름대로 타진하고 가능하다면 한국사회의 국론분열·태세이완·사회혼란 등을 유도해 보자는 것이 그들의 대화목적인 것이다. 이것은 대화를 하는 일방으로 땅굴을 파고 특수부대 강화 등 공격형 군사력을 증강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접촉의 진행양상도 이런 그들의 고정 「패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0·26사태」가 난 몇 달 후인 금년 1월 총리회담을 제의한 점이나 그후 5월초까지는 그런대로 실질토의에 응하다가 5·17이 있은 후인 5월 하순부터는 전혀 실질토의에 응하지 않은 점 등에서 이것은 잘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10·26」 이후의 우리 태세를 확인하고 가능한한 혼란·분열을 유도해 보려는 기대속에 접촉을 계속해오다 5·17로 사회안정이 확립되고 대공태세가 더 강화되자 대화로 얻을게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지난 6월 9차 실무접촉에서 아프지도 않은 현준극이 칭병, 불참한데서부터 우리는 이미 북한이 대화를 중단하리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전의 남북조절위 남북적십자회담의 중단이나 작년의 이른바 「변칙대좌」의 중단 등의 사례를 보면 이번의 일방적 중단선언도 사전에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5월22일에 열린 8차 실무접촉에서부터 북측이 총리회담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도 않은 채 엉뚱하게 한국의 국내문제에 관한 비방만 일삼아 온 점, 현준극의 칭병 불참, 9월4일부터 휴전선에서의 대남 비방방송 재개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75년 유장식이 칭병 불참하고 마침내는 회의 하루전날 일방적으로 무기연기를 통보해온 남북조절위 부위원장 회의의 중단과정과 흡사한 것이다.
북한 공산집단의 이같은 「대화전술」을 우리가 아는 이상 대화가 계속되는 중에라도 대북 경계태세를 늦출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런 만큼 이제 북한이 대화통로를 차단하고 공식적으로 말은 않고 있지만 긴장고조의 방향으로, 대남 강경노선 쪽으로 돌아선 것이 확실한 이상 전후방의 대비태세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특히 10월 노동당 전당대회를 눈앞에 두고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긴장을 고조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그들 내부의 사정도 대화중단의 한 이유로 생각될 수 있는 만큼 우리로서는 공비침투 등 무장도발을 더 한층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북한의 일방적인 대화중단을 한두번 겪은 것도 아닌 만큼 도발에 대응하는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으로 대화재개를 통한 긴장완화의 돌파구를 항상 끈기있게 모색하는 장·단기 대북정책을 끊임없이 개발·추진하는 노력 역시 중요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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