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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투고] 첫사랑 추억으로 물든 나의 캠퍼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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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버스를 1시간30분가량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천안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나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갈아탔다. 차에서 부족한 잠을 채우고, 또 걸어 올라가야만 보였던 내 학교.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고백이지만 나는 가까운 학교를 다니기 위해 휴학까지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내 마음이 어떻든 다녀야만 했고,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나면서 학교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에도 서툴렀던 나는 날이 쌀쌀한 때 처음 그 사람을 보고, 봄이 돼서야 사랑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아찔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혼자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눈앞에서 화려한 벚꽃 잎의 향연이 일어나는 바람에 내 마음을 진정하기 위한 산책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러하듯이 나도 사랑스러웠을 거라고 믿고 싶다. 다시 못 볼 것 같은 시간 앞에서 상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 두 권을 선물로 줬다. 아직도 책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물건은 나를 애틋하게 만든다.

 어렸지만 중요한 감정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남아 있어 조금이라도 혼자만의 감정을 더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방학인데도 기숙사에 머물렀다. 기숙사 방에는 큰 창문이 있었는데 언덕과 가까이 붙어 있어서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뿐이었다.

나는 그때 초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침의 반짝이는, 낮의 짙푸른, 밤의 어둠에 잠긴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며 사색을 즐겼다.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우들과 야식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닿지 않는 마음을 정리했던 것 같다. 당시는 나름대로 참 힘겨웠는데 정작 요즘은 너무도 그리운, 두번 다시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 한번 학교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계속해서 좋았다. 공부하다가 갑갑할 때에는 학교 근처 천호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앞에도 석촌호수가 있었지만 천호지의 내음이 훨씬 상쾌했다. 아마도 차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폭설이 내렸던 겨울에도 나름 운치가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학교부터 터미널로 가는 지름길에서 특히 감상에 젖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를 비추는 붉은 가로등이 몸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하게 데워줬다.

 그렇게 나는 가장 예뻤던 나이에 천안을 만났고, 그 안에서 성장했다. 그랬음에도 매정한 나는 졸업 전에 취직이 됐다고 학사모도, 졸업장도 받지 않았다. 그게 맞다고,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제 와서야 마지막 매듭 정도는 짓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나름 후회하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대신 올해 안에 학교를 다시 방문할까 생각 중이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곳이니 언제 가도 추억이 새록새록할 것이다. 서울의 어른 노릇이 견디기 어려워질 때쯤 흩어져 가는 기억을 다시 만나고 싶다.

권수아 단국대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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