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의「아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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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세기후반에「아랍」지리학자「이븐·홀다드베」가 쓴 지리책에 이미 한국에 대해『가금이 넘쳐흐르는「시이라아」의 나라』라 설명하고 있다.
「시이라아」가 신라의 음독에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아랍」인은 이미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에 왔었을까?
기록에 남은 것으로는 고려사의 정종6연에 적힌 다음 구절이 처음인듯 하다.
『대식국객상 보나개 등이 와서 수은·용치·점성향·몰약·대소목등을 바치니 유사에게 명하여 대접을 융숭히 하고, 돌아갈 때 금과 비단을 후히 주었다‥.』
당시 예성강구의 벽란정은 흡사 국제무역항이나 같았다. 여기에는 송나라와 외상은 물론이고「아라비아」(대식국)의 상인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옛날 동양과 서양과를 연결하는「루트」를「실크·로드」라 했다.
이 길을 따라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갔다. 이 길을 타고「마르코·폴로」가 아버지를 따라 동방으로 왔다.
「마태」복음 제2장에 보면「예수」가 태어나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황금·유향·몰약』등을 선물로 바쳤다.
이 선물들도 다름 아닌「실크·로드」를 타고 간 동방의 산물이었다.
이 길의 한 복판에「바그다드」가 있었고「콘스탄티노풀」이 있었다.
그리하여「이슬람」의 문화는 이 길을 따라 온 세계에 퍼졌다.
7세기 말 때의 것으로 추정되고있는 나량의 고송총에서 나온 것 등에 백동경이 있다.
거기에는 사자와 새, 나비 등이 새겨져있고 포도당초무늬가 있었다. 벽화는 또 이른바 「인동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모두에서「사라센」예술의 자취가 엿보인다. 경주의 무열왕 비에 담아있는 용문??조초의「릴리프」도 마찬가지다.
육당에 의하면 고려 때 서울에 회회교의 교당까지 있었다. 이조초에는『회회대조회송황』 이란 것을 국전적으로 준행하였다 한다.
세종9년에 포교는 금지되었으나 대국신당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민간신앙화 되기까지 했다.
가만히 우리네 역사책을 펴 보면「사라센」문화의 영향은 꽤나 많다.
고려 때에 들여온 역법·관측기·수학은 물론이요, 회회약초로 만든 해독제며 외과수술법 등이 활용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엊그제 문공부장관은 15개 회교·국 대표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한국과「사라센」문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
그리고 보면「15」라는 숫자도 다름 아닌「아라비아」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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