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918)제70화 야구에 살다(17)미 프로팀 내한|김영조<역자=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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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2년 10월에 황성기독청년회와 동경유학생으로 구성된 조선연합군(감독 김인)이 일본으로 가 7차례의 경기를 가진 것이 우리 나라 야구의 첫 해외 원정이다. 이에 앞서 1911년 황성기독청년회 야구「팀」은 축구「팀」과 함께 평택으로 원정, 숭실대와 대전하여 대승을 거둔 적이 있는데 이것을 야구사상 최초의 윈정경기라 하겠다.
l918년과 1919년에는 일본의 조도전·법정·명치대 등이 잇따라 원정을 온 적이 있으나 이들은 철도「팀」 등과 친선경기를 벌여 일본인들만의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국제교류의 서막은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팀」의 내한과 2년 후인 1924년 기독청년회(YMCA)「팀」의 「하와이」 원정이다.
미국야구는 2년 전인 1920년 5월 「시카고·팀」이 일본에 원정, 조도전·명치대 등과 일련의 경기를 벌였고 국내 신문에도 자세히 보도돼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재차 일본에 온 길에 한국도 방문토록 야구인들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우여곡절을 극복한 끝에 실현되었다.
이전에 한국야구가 야구의 종주국인 미국인들과 「플레이」를 해본 것은 바로 그해(1922년) 10월 제3회 전 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중앙체육단이 서울거주 미국인들로 구성된 「올아메리컨·팀」과 경성중 구장에서 친선 「게임」을 한차례 가져 본 것이 유일한 경험이었다(7-5로 중앙이 승리).
조선체육회 이사이며 심판에 선수로 활약하던 이원용은 10월30일 미 「프로」야구만이 일본에 왔다는 소식을듣자 체육회장이던 고원동을 설득, 여비 2백원을 얻어 초청교섭 차 일본으로 떠났다. 미국 「올스타」는 12월4일 「나가사끼」(장기)에서 배편으로 중국 상해로 갈 예정임을 알고 도중에 한국에 들르도록 할 참이었다.
동경에서 이원용은 미국의 「헐버트·헌트」 감독을 만나 「개런티」 1천원에 서울체재비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제시, 쉽게 합의를 봤으나 1주일만에 돌아와서 의외의 장벽에 부닥쳤다.
체육회 이사회에서 이사장 임경득 이사 박자병 등이 맹렬히 반대, 초청 건을 부결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거금을 들여 「프로·팀」을 불러올 필요가 뭐 있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야구가 생활의 전부였던 이원용은 체육회 이사직을 사임하고 이중국 김병태의 도움을 받으며 동일은행두취(은행장) 민대식으로부터 5백원을 대출 받아 박석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기어이 초청을 성사시켰다.
명 투수인 박석윤(후에 경성매일신문부사장)은 소속「팀」인 중앙체육단을 주축으로 전 조선군을 편성했는데 박천병 손희운(33인 대표 손병희 선생의 양자) 이태동 이석찬 안맹저 김봉술 함용화 등에 이원용이 주장을 맡았다.
세계적 선수인 「로버트·헌트」(세인트루이스·카디널즈)를 비롯해 「화이트」 「부시」(뉴욕·양키즈) 「켈리」 「스텐글」(뉴욕·자이언츠) 「스티븐슨」(클리블랜드) 등 15명으로 짜여진 미 「올스타」는 12월7일 경성에 도착, 바로 이튿날 용산 철도구장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전 조선군과의 대전을 가졌다.
이 최초의 국제경기는 예상대로 미 「올스타」의 일방적인「페이스」로 시종, 수천 관중의 넋을 잃게 했으며 「스코어」는 21-3이었다. 전 조선은 8회에 1점, 9회에 2점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양키」들이 양보의 미덕을 발휘했던 것 같다.
1924년 6월 YMCA「팀」의 「하와이」 원정은 그 전해에 「하와이」 교포학생「팀」의 모국방문이 계기가 되어 이뤄졌다. 허성 「코치」가 인솔한 YMCA는 그러나 「하와이」 거주 미국인·중국인·일본인 「팀」에 3전 3패, 역시 선진기술을 배우는데 보람을 찾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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