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의 잃어버린 페이지'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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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越北) 화가'는 냉전시대의 한반도가 낳은 특수 용어다. 한국전쟁 때 남에서 북으로 간 화가들은 분단 상황 아래서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들이 그림으로 돌아왔다.

28일까지 서울 일원동 밀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미술의 잃어버린 페이지'전은 정종여.길진섭.이쾌대.리팔찬 등 월북 화가들을 포함한 33명 북한 작가의 작품 70여 점으로 1950~60년대 북한 미술의 단면을 증언한다.

사라진 한국 미술사를 복원한 주인공은 남북나눔회(회장 홍정길 목사)다. 지난 93년부터 민간 차원에서 북한에 5백억원어치의 생필품을 지원해 온 남북나눔회는 북쪽이 그 답례로 선물한 미술품 5백여점을 갈무리해 이번에 활동 10년을 기념하며 선보였다.

작고한 작가들의 유족과 친분을 쌓으며 어렵사리 작품을 수집한 홍 목사는 "70년대 들어 조선화 중심의 주체미술이 전성기를 맞으며 월북 화가들의 그림이 구시대의 유물로 배척 당해 보존이 시급했다"고 말했다. 남과 북에서 모두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외면 받은 모순과 불행을 겪은 이 화가들은 그대로 한국 현대사를 대변하고 있다.

정종여(1914~84)가 그린 '참새'는 가시나무로 갈린 북쪽에 화가 자신을 가리키는 참새 한 마리를, 남쪽에 두고 떠난 3녀 1남과 부인인 듯 보이는 참새 다섯 마리를 배치해 분단으로 찢긴 가족사를 상징했다.

길진섭(1907~75)의 '자화상'이나 리팔찬(1919~62)의 '노인'은 조선 초상화의 전통을 이은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눈길을 끈다. 리팔찬과 함께 국내에 실물이 처음 소개되는 오택경(1913~78), 최연해(1910~67)의 유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이 잘 드러난 수작이다.

특별전으로 마련된 '함창연 판화전'은 53년부터 59년까지 폴란드 바르샤바 미술대학에 유학해 유럽의 판화기술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함창연(1933~2000)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자리다.

어렵기로 이름난 석판화와 동판화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그는 여러 차례 국제 판화공모전에서 수상하며 한국의 뛰어난 판화 실력을 세계에 알렸다.

북한미술을 연구해온 김복기('아트 인 컬쳐'주간)씨는 "88년 정부의 납.월북 작가 해금조치 뒤 1백여명 월북 미술인들의 윤곽이 상당 부분 밝혀졌지만 급박한 전시(戰時) 상황에서 자진 월북과 강제 납북의 명확한 구분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며, "근.현대미술사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인 만큼 밀알미술관의 5백여점 소장품은 앞으로 그 연구의 중요한 1차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를 둘러본 이인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은 " 국립현대미술관도 50~60년대 작품을 이렇게 알뜰하게 모으지는 못했다"고 반가워하며 "북에서 인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집중한 역량과 시대를 읽으려는 노력이 그림에 그대로 묻어난다"고 평했다. 무료. 02-3412-006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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