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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라도 마음놓고 먹었으면… | 허정<서울대 보건대학원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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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굶어 죽은 구신아, 칼맞아 죽은 구신아, 오다가다 죽은 구신아, 임벵에 죽은 구신아, 괴정에 죽은 구신아…상사들어 죽은 구신아, 몸다리 구신아, 호식에 간 구신아.』
이 넋두리는 박경리 작 『토지』 제1부에 나오는 괴질을 일으킨 객귀를 쫓아내는 아낙네의 소리다. 이 소설이 배경으로 잡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콜레라」 같은 역질이 많이 돌았던 것 같고, 순조실록에 보면 『1880년대에도 기근과 함께 여름이면 괴질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되어 있다.
역사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종래의 의료기술로는 손을 쓸 수 없어서 (의막능집증) 근대적인 의미의 서구식 소독 내지 예방법이 도입됐고 결국 서양의료 수입의 계기가 됐지만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는 으레 여름철이면 장「티푸스」·이질이 번지고 토사광란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콜레라」도 자주 만연되어 왔다.
질병을 중심으로 볼 때 1960연대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역사는 창궐하는 전염병을 막아내고 예방하는 투쟁으로 일관되어 왔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의·식·주를 중심으로 한 기초환경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더러운 물이나 식품을 매개로 하는 소화기 전염병이 고온다습한 여름이면 계절적으로 큰 유행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되고 생활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새로운 의미의 환경문제와 의·식·주의 과학화 내지 보건화가 촉구되고 있다.
근래 보도된 바에 따르면 금수강산이라 해서 첫째로 손꼽아 왔던 강이나 냇물이 지각없는 사람들에 의해 재생 불능할 정도로 병들어 가고, 다같이 즐겨 먹던 참외나 수박 같은 과일이 살충제나 농약을 너무 써서 먹을 수 없고, 아침이면 찾아가는 도시근교의 약수물도 안심할 수가 없으며, 심지어 시골에선 우물에도 농약이 스며들어 해충은 고사하고 사람마저 살기 어렵게 됐다는 서글픈 얘기가 나돌고 있다.
보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산업사회의 의·식·주 문제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의 환경문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우선 농업사회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산업발전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가 제기된다. 공장이 들어서고, 농약을 써서 수확물을 많이 올리려고 힘쓰고, 축산이나 낙농업에도 가축의 빠른 성장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항생제나 화학물질을 많이 쓰다보면 결국 우리 인간에게 피해가 돌아오기 쉽다.
쌀을 증산하기 위해 구충제를 많이 쓰면 해충은 해마다 저항력이 센 것만 살아남아 더 독한 약을 더 많이 쓰게 되고 이 약은 땅속에 축적되어 쌀 속에 들어가고 우리 몸 안에 또 다른 피해를 주기 쉽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의 순환원리를 무시한 성급한 산업화에 뒤따르는 개발의 대가다.
따라서 앞으로는 경제발전이나 산업화도 중요하지만 이에 따른 대기나 하천의 오염 예방대책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고려돼야 하겠다. 농약의 사용도 효과적인 새로운 제초제나 살충제가 우리 인간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심사숙고한 연후에 농민들에게 권장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 생존을 위협하고 인명피해까지 일으킬 수 있는 식품과 하천보호 같은 분야는 의약품의 국가관리와 똑같이 엄격한 규제를 해나가야겠다. 비록 우리들의 환경보전법이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다소 규제조치가 적다손 치더라도 모든 공장이나 산업체가 현행 법규를 충실히 지켰다면 우리 강이나 공기는 그렇게 멍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밤이면 공장을 가동하고 남의 이목을 피해 폐수나 공해물질을 배출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시냇물은 깨끗하지 못하게 됐다.
또 현행 법규대로 식품의 제조나 유통과정을 관리해 왔다면 한여름에 며칠을 두어도 썩지 않는 빵이나 외식을 하고 식중독에 걸린다는 얘기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나라도 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직접적인 생존에 관계되는 의식주에 관한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보건사업의 추진이 요청되는 시기에 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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