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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손숙 배우·전 환경부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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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애비는 종이었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1915~2000) ‘자화상’ 중에서

한때 문학소녀였던 나는 미당 서정주 선생 말년에 자주 뵐 수 있었던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른은 세상 다 버리신 듯 관조하는 모습으로 주위에 모여든 이들과 격의 없이 시를 낭송하고 문학과 연극 얘기로 꽃을 피웠다. 우리 문화계의 르네상스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서구 살롱 문화 같은 느낌이 좋아 나는 늘 가슴이 뛰었다. 막내로 끼어들어 사랑도 많이 받았고 곤궁했던 현실을 잊고 일찌감치 접었던 문학에의 향수를 달랠 수 있었다.

 이 시 ‘자화상’을 읽고는 스물세 살에 어떻게 이런 시를 쓰셨을까, 경탄했다. 내 처지에 시를 대입해 넣고 ‘어쩜’ 감탄사를 연발했다. 요즘 ‘문화융성’이란 말이 무슨 구호처럼 내걸리는데 문화융성이 별건가. 온 마음을 던져 공감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접하는 것이 곧 문화융성 아닐까. 삶 속에 문화를 들이는 것, 일상 속에서 작은 문화 행동 하나를 일구는 것이 자발적 문화융성 아닐까 싶다.

 요즘도 이 시를 가끔 꺼내 읽고 외우다 보면 내 헐벗었던 젊음과 미당의 초연한 미소가 겹쳐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이 굉장히 그립다. 손숙 배우·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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