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8> 제4차 통화교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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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차 통화교환 조치에는 은행점포68개, 금융조합점포2백39개, 총사원3천7백50명. 연인원3만7천5백명이 동원되었다. 교환액은 전체교환액의 32%에 해당하는 2백34억2천9백만원이였다.
이로써 남한 전역에 걸쳐 통화교환조치를 실시한 셈이였다. 그러나 치안상태로 말미암아 은행 또는 금융조합의 문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소정기간안에 교환하지 못한 지역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제3차 조치가 끝나는 11월18일에 이어 계속 제4차 조치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따로 기간을 설정하지 않고 은행이나 금융조합이 문을 열게 되는대로 군수ㆍ경찰서장ㆍ금융기관장 합의아래 지역과 기간을 정하여 교환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 조치는 l951년 4윌이 다 가도록 끝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끌고 가기만 할수도 없었으므로 재무부고시 게30호에 의하여 l951년 4월30일로써 일단 마감됐다. 제4차 조치때는 18개 은행점포와 1백30개 금융조합점포, 1천5백50명의 인원과 6천2백명의 연인원이 동원되어 90억6천만원을 교환했다. 전후 네차례에 걸친 교환에도 불구하고 지리산과 태백산기슭의 일부 지구는 부득이 교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니 교환불능지역은 전남북및 강원도의 8개군 18개중 28개리와 약간의 부락이었다. 네차례에 걸친 통화교환 실적을 보면 현금교환액 5백35억원. 예금액 1백58억원, 기타26억원으로 합계 7백19억원에 달했다.
이는 교환의 대상이 된 조선은행권 7백71원의 93%에 해당하며 나머지 7% 52억원의 통화가 수축된 셈이었다. 통화교환조치와 아울러 공산군이 남침했을 때 불법발행한 적성통대,즉 소위「인민권」과 「A기호간원권」을 금융기관에 등록시겼는데 인민권은 2백55만원, A기호천원권은 18억원이 등록되었다.
위험을 무릎썼던 만큼 사고도 발생했다. 자동차충돌, 공비의 습격등으로 조흥은행직원 1명이 사망했고, 금융조합직원 및 경관의 부상과 자동차의 소실, 파손등 피해가 적지앉았다.이밖에 직접 교환종사자는 아니었지만 교환기관(은행 또는 금융조합) 경비를 위해 공비와 교전중 사상한 경관과 청년경비대원도 있었다. 모든 교환조치 종사자들의 용기와 책임감으로 현찰에 전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 아니할수 없다. 지금은 50대 혹은 60대가 되어있을 당시 종사자들의 노고에 대해 지금도 고마움을 금할수 없는 것이다.
회고하건대, 이 교환사업은 전선ㆍ전국이 혼돈한 전투지구, 또는 잔적이 출몰하는 산간벽지를 누비며 때로는 전진하면서, 때로는 전투, 또는 후퇴하면서 교환하는, 실로 금융사상 유례없는 통화조치였다.
그 결과 피침지역에서 약탈 또는 불법남발된 적성통화의 유통을 금지하여 공산도당의 공작자금이 스며드는 것을 미리막고 적의 경제교란음모를 분쇄함으로써 전쟁수행에 이바지한 바 적지 않았다.
한편 경제면에 있어서도 52억원의 통화 수출과 1백58억원의 예금 흡수로 전쟁「인플레」억제에 다소나마 기여했고, 또 일제와 공산집단에 의하여 더럽혀진 조선은행권을 새로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함으로써 우리나라 화폐제도를 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재정자금 적자와 「유엔」군 대여금으로 말미암아 한국은행권 발행액은 6월말현재 6백69억원에서 10월말현재 1천1백88억원, 11월말 현재 1천5백억윈. 12월말 현재2천2백92억원으로 급증했다.
한편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10월21일 북괴에 「유엔」군 군정기구가 설치되고 김성주씨가 평남지사에.「Rㆍ먼스키」대령이 미8군 민경장관에 임명되었다. 한국은행도 북한지역에 대한 통화대책과 아울러 통화수요 급증에 따르는 통화공급대책을 검토했다. 일본에서 인쇄된 한국은행권은 처음에는 시간을 다투기 위하여 군용기로 수송했고 나중에는 대량수송을 위해 군용선을 이용했다. 따라서 언제까지 인쇄를 일본당국에, 수송울「유엔」군에 의지해서 한국은행권을 공급하는데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또 6ㆍ25동란전까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폭격으로 소진된 이상 새로운 조폐공장의 건설이 시급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부산피난 중에도 조폐공장시설을 구상하고 동래에 가서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또 화신산업이 일본에서 수입한「오프세트」인쇄기가 보세창고에 있다고 해서 수소문도 해보았다. 그러던중 서울 환도를 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오자 이를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전발권국장 오정환에게 조폐공장 건설을 위임하여 동래에 파견하고 나는 미군용기로 일본에 가서 한국은행권의 인쇄용 원판을 찾아왔다. 이것이 후일 한국은행권을 재조한 동래조폐공장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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