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사이공 억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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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78년 9월 29일 오후, 나는 2번째로 북괴요원들 있는 곳으로 호송되었다. 경호책임자는 지난날과 같이 광대뼈 보좌관인 경찰중위였다. 『왜 자꾸 나를 북한요원들에게 데리고 가는 거요.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테니 데리고 갈 필요가 없소』하였더니, 그는 『당신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친구(북괴)에게 부탁해서 알아보는 것 아니요. 「박추틴」 친구들을 만나지 않게 해주면 우리 월남 측에 다 털어놓고 이야기 해주겠소?』하였다.
『나는 치외법권을 갖는 외교관이오. 당신들 심문에 답변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자동차는 「사이공」시 「콩리」가 l89번지에 도착했다. 2층에 올라가니 북괴요원 2명이 전날과 똑같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전날에는 심문 받는 동안 경비경찰 하사관이 문밖에 있었는데 오늘은 방안에 의자를 가지고 들어와 앉았다.
지난 월요일 심문이 끝나고 돌아갈 때 광대뼈 보좌관에게 북한요원이 나를 때리려고 했다고 항의했더니 그는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물어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때문에 오늘은 경비경찰 하사관이 방안에 배치된 것 같았다.
잠시 후에 흰 「노타이」를 입은 자가 말하였다.
『저번에는 서로 이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이야기를 못했는데 오늘은 민족적 견지에서 동족끼리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그게 무슨 말이요. 나는 이성을 가지고 말했소. 그 날 할말을 다했으니 앞으로는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답변하기 않겠소』하고 말했다. 사실 국제법이 있고 없고가 문제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심문에 응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항거한다는 점에서는 국제법이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북한 고향에 있는 누님과 나와의 혈육지정을 악용하여 나의 마음을 움직여 보러 하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북반부 고향에 있는 당신 누님들과 조카들의 소식을 전해줄 용의가 있소』하고 북괴선임요원이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가운데 약2분이 경과했다. 흰색 「노타이」 입은 자가 말하였다. 『당신이 외교관이라고 주장하니, 그럼 그렇다고 해둡시다. 또 전향도 안 하겠다니 그것도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남북회담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동족으로서 이야기해 보자는 겁니다.』
말하는 솜씨나 어조로 보아 북괴요원2명은 손발이 잘 들어맞는「콤비」였다.
뚱뚱한 선임요원은 야생적인 공갈협박형이고 흰 「노타이」를 입은 자는 은근히 장대를 함정에 유도하는 술책형이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북괴 선임요원은 『앞으로 남북 간에 전쟁이 나면 당신과 당신 조카들은 총을 서로 겨눠야 하게 되지 앉소. 그래 그런 전쟁을 우리가 동족끼리 해야되오』
어떻게 해서든지 입을 열게 하려는 눈치였다. 그들은 남북대화문제, 민족문제, 형제자매간의 혈연문제 등을 이것저것 들고 나와 나를 함정으로 밀어 넣으려고 시도했으나 묵비권행사로 일관하자 나를 돌러보냈다. 그러나 오늘의 심문에서 나를 다소 놀라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즉, 북괴요원은 나의 북한 고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괴선임요원은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동안 손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그것을 손에 들고 혼잣말로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리 142번지, 그 곳은 지금 살기 좋은 과수원으로 변했지』하고 중얼거렸다.
누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그들이 나의 고향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사실은 아주 분명해졌다.
그러나 북괴요원들이 그것으로 나를 많이 괴롭힐 수는 있겠으나 나의 사생관·국가관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형무소에 들아 오니 E동 구대서기 「리엔」이 「한국외교관 3명은 제2단계 심문을 받기 위해 불원간「하노이」로 북송된다』고 재차 말해 주었다. 식욕이 떨어져서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그래도 죽는 날까지는 건강을 유지해야 그자들과 떳떳이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되어 안영사가 보내준 돼지고기 통조림을 뜯어서 형무소의 식은 밥과 함께 먹었다. 설거지가 끝난 다음 서영사에게 비밀편지를 썼다. 오늘의 심문 묵비권행사, 그리고 나의 각오를 다시 알리는 내용의 편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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