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PL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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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사우디아라비아」공동성명에서 한국측은「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PLO의 대표권을 인정한다고 천명했다. 한국측의 이와 같이 입장천명은 중동의「아랍」산유국에 대한 자원외교라는 차원을 넘어서 제3세계와 비동맹권을 향한 한국외교의 새로운 경지 개척이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일이다.
해방후 한국외교사장 우리 정부가 제3세계지역의 민족주의적 혁명단체를 승인하기로 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 같고, 미국이나 일본을 앞질러 가면서까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앞으로 이러한 의사표명의 후속조치로 PLO가 과연 서울에 자기측 대표부를 설치하겠다고 할 정도로 일이 진척될는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하겠지만, 어쨌든 종래의 한국외교「패턴」에 비한다면 파격적인 전환이었다.
외교란 상이한 다자를 상대로 하는 일종의 다수파 경쟁이요, 우리「편 만들기」경쟁이다. 특히 북괴와 대립하고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북괴 보다 더 많은 우호국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의 외교는 미국과 서구를 상대로 한 단선적인 동맹교에만 치중하였어도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이후 초년대에 들어와선 그런 안이한 단선외교에만 안주할 수는 없게 되었다.
70년대 국제정치 판도에는 냉전적인 흑백논리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편을 가를 수도 없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3세계 지역에서의 민족문제의 전개과정에서 순수 공산정권도 아니요 그렇다고 서방적인 자유주의체제도 아닌 중도적인 민족주의 정권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권들은 체제상으로는 비공산계이나 외교정책 면에서는 다소 좌경적이거나 중립적인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외교의 흑백논리적 감각으로서는 아예 그쪽 방면에 대해서는 친선도모 조차 할 생각을 안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근한 예로「아랍」과「이스라엘」이 다투는데 있어 반공한국의 입장으로서는 유대교를 믿는「이스라엘」이나 회교를 믿는「아랍」국들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이념적으로 특별히 친소감을 느끼거나 차별을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한국외교는 오랫동안「이스라엘」만 우방으로 생각했지, 「아랍」쪽에 대해선 일종의 기피감까지 품은 듯한 인상마저 주어왔었다.
이것은 아마도「이스라엘」은 기독교를 발생시킨 친 미국이고, 「아랍」은 중립주의 경향을 띤 나라라고는 하는 일종의 냉전적 고정관념 때문이었던 듯 짐작되는데 이야말로 낡은 외교감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편중된 외교「패턴」때문에 우리가 그 동안 제3세계를 상대로한 다수파활동에 있어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 왔나하는 것을 생각하면 재고할 바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우리 정부도 6·23선언을 통해 초이념적 전방위외교를 지향하여 한국외교의 기반확대를 국책화하기로 한바 있지만, 이제야말로 우리도 다양한 세계에 적합한 성숙된 외교를 펼 때가 왔다고 본다.
PLO 승인용의를 천명한 것을 기점으로 한국의 제3세계 및 비동맹외교가 좀더 적극적으로 활성화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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