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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기고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갑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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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10년 같은 100일이었습니다. 자책과 애도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구해주지 못해,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어 안타깝고 미안했습니다. 그런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묻은 여러분의 단장(斷腸)을 헤아릴 수나 있을까요. 소설가 박완서도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충격과 고통을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또 다른 기대를 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아파하고 슬퍼한 이 사건은 국민 통합의 기회라고 말입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 후의 미국 시민들처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은 일본 국민들처럼 우리도 달라질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의 신념과 리더십이 부재했던 탓입니다. 오히려 불신과 갈등은 커지고 편 가르기 진영 싸움은 심화되었습니다. 각종 음모론이 튀어나오고 진실의 소리는 숨어들었습니다. 툭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국가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이고 공들여 쌓아온 대한민국호가 세월호처럼 침몰하려 하고 있습니다. 희생자와 유족 여러분께 또 한 번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제헌절 경축식에 다녀왔습니다.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절규하는 일부 유족들의 눈빛에서 분노 를 읽었습니다. 기념 공연이 거친 항의 속에 중단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국민 유가족’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안으로 끌어안을 때 더 애틋하고 거룩해집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정은 발목이 잡혀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고 있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놓고도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물론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보궐 선거를 앞둔 정당과 후보들은 표를 의식해 여러분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일 못하는 국회라는데 핑계가 생겼습니다. 이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정치권의 말 한마디에 시비를 따지려 하지 말고 엄숙히 기다린다면 그들에게 더 큰 중압감으로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며 대한민국은 세월호 의인들 같은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존속·발전해 왔음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독립 유공자의 후손들, 이미 작고했거나 아직도 병석에 누워 있는 6·25전쟁 참전 용사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이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온 국민이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 상복(喪服)을 입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며칠 후면 8·15 광복절입니다. ‘빛을 다시 찾은’ 마음으로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 힘차게 만세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겐 또 다른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큰 의무와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고결한 정신을 기리고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들이 남긴 ‘헌신’ ‘희생’을 ‘사랑’ ‘희망’이라 바꾸어 읽어 봅니다. 피우지 못한 그들의 꿈, 가족애와 조국애, 세상을 향한 열정이 우리 앞에 남겨졌습니다.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은 그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처럼 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며칠 전 헬기 사고로 다섯 명의 소방관이 순직했습니다. 헬기에 타고 있던 소방관들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살신성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 절체절명의 순간 세월호 의인들을 떠올리고, 또 선장을 반면교사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실종자 열 명이 바닷속에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간곡하게 한 말씀 드리자면 이제 4월의 진도 앞바다, 눈물의 팽목항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리시기 바랍니다. 많이 힘들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그만 놓아주시기,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노란 리본을 옷깃에서 가슴 안으로 옮겨 달고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