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닌 속설론 반증 성립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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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규호씨의 반론을 읽고- 신봉승>
사실을 논하는 글은 어떤 경우에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것이 상식이며 정도다. 속설이나 통설을 가지고 반증 없이 얼버무리면 쟁점만 흐리게된다. 지난2일자(일부지방3일) 신규호씨 의 글은 핵심에서 벗어난 곳이 많으며 사실을 들어 반증한곳이 단 한곳도 없었다.
첫째, 상복에 흑각대 대신「흰각대」 를 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필자가 노산군 일기에 적힌 사실을 밝혔는데도 수양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서 우길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대체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전 고에서는 노산군 일기로써 예증하였거니와 이번에는 문종 실록을 보자. 즉위 년 2월17일조에 『종친과 백관들이 백의, 오사모, 흑각대 로 곡임 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이 세종 상에는 왕자지만 문종 상에는 종친이 된다.
사실이 이런데도 흑각대가 아니라면 「흰각대」 설의 근거를 밝혀야되지 않는가.
둘째, 사모의 뿔에 관한 것인데, 사모가 명종 때 들어왔다는 주장은 망발이다. 고려사지 권26에 「시혁호복 의 대명제자일품지구품 개복사모단령」이라 되어 있고, 한원운이 쓴「남당초고」 에 『각이 없는 것은 모자요, 각이 있는 것이 사모』라 적고있는데도. 흑앵을 달았다고 「한다」, 혹은 그것이 떨어졌을「것이다」와 같은 모호한 어휘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가.
셋째, 여자들에게 유가의 법도를 정하는 시기. 태종6년에 있었던 허응의 상계에『부인유삼 종지의』라는 구절 이 보이기 때문에 그시기로 증명된다는 견해도 궁색하기 짝이 없다. 이 구절 을 찾자면 중국의 송 대 에도 있거니와 고려의 중·말기에도 있다. 주자학이 그때 들어왔기 때문이다. 또 신씨가 세종실록을 자주 들먹이는데 진실로 읽어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세종실록을 보면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도처에 적혀있다. 심지어 사대부 집의 유부녀가 혼전의 애인과 밀회를 하는가하면, 「키스」도 요즘과 같이 『혀를 바꾸어가며 핥았다』(교경지설)는 기록도 있다. 조선조여인의 주자학적인 기본 상은 소혜 왕후(수양대군의 며느리이며, 성종의 어머니) 가 펴낸 『내훈』 에 소상히 기록되어있으며, 이 또한 「경국대전」이 매듭지어질 무렵인 성종6년에 간행되었다.
때문에 조선조 여성들의 유가적 규제는 성종 이후라고 하는데도 반론이 있겠는가. 역사사회학파들의 논문에도 조선조 여생들의 유가적인 규제가 이 땅에 토착화한 것은 17세기 후 라고 적혀 있다.
넷째, 주택의 금제 에 대하여.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가 다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한명준, 권남의 집이 금제 에 벗어나게 크다고만 하고 그 구체적인 예증은 왜 제시하지 못하는가.
한상질·권근의 경우는 종친과 문무관 이품에 해당되기 때문에 40간이다. 정침, 익낭, 서청, 내누, 내고는 매간당 장9척, 광은 전 후퇴가 모두 16척이요, 퇴왕9척, 사낭은 장8척5촌, 광8척, 왕8척, 그리고 행낭은 사낭 과 같게 되어있다. 이상과 같은 건물이 들어서면 용도에 따라 장내에 담이 있다. 담이 있으면 중문이 있어야지 사다리로 담을 넘는단 말인가.
중문이 없다고만 할게 아니라 왜 없다는 근거를 밝혀야한다. 또 금제 는 시행이 잘되지 않아서 자주 개정한 기록이 있는데 「엄했다」 는 것도 사실무근이다.
다섯째, 한명회·권남이 조부의 후광을 입고 출세를 하다니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그것은 집을 말하는 것이지 문음제 가 아님은 문맥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섯째, 노산군 일기의 곡필 부분과 신빙성 여부는 전고 에서 필자가 이미 밝힌바있고 김종서는 역신으로 그리지 않았으나 수양 쪽에서 보면 역신이 된다고 하였는데 필자의 견해와 같은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뿐이다.
일곱째, 8개의 고증만 지적한 것을, 나머지를 인정해줘서 다행이라고 하는 따위의 표현은 아전인수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심히 결례가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며, 여덟째,TV극작가는 역사해석이나 사관 따위는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이 같은 망언이 어디에 있는가. 사관이 어찌하여 역사학자만 가져야 하는 것인가.
목적논적사관,역사법칙논적사관,역사리논으로서의 사관과 같은 학문적 차원이라면 모를까, 역사의식이나 역사해석에 필요한 사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데 역사극을 쓰는 사람에게 사관을 갖지 말라니 사관도 없이 역사극을 쓸 수 있는가. 또 사관이 어디 신씨가 가져라 말아라할 성질의 것인가.
아홉째, 『고운 님 여의 옵고』 에는 아직 홍달손이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홍달손 운운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항아리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가위 바다를 기울일 주호 라 하여 세조가「경해당」이라는 호를 지어 내린 홍윤성 이다.
홍달손과 홍윤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나오지도 않은 인물을 나왔다 고하는 무지와 부성실로도 TV주평을 쓸 수 있는가.
반증이 없는 신씨의 글은 사실을 논의할 대상이 못된다는 사실을 명시해 둔다.

<필자=방송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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