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지배에 반기 든 「게릴라」전의 영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동서 냉전 속 소 영향권 벗고 비동맹운동 선도
경영의 생산자관리·지방분권·중립외교표방
80고령에도 나들이…78년엔 미-북괴 오가며 남북한 중재 자청
「유고」에서 교통신호가 왼쪽으로 진행방향을 표시하면 자동차들이 오른쪽으로 간다는 우화가 있다. 「유고」가 공산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자본주의 색채가 짙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티토」는 스스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 공산국가 중에서 가장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 유파를 만들어 놓은 인물이었다.
흔히 「티토이즘」으로 불리는 그의 정치이념을 굳이 정의한다면 경제활동의 생산자관리·지방분권·비동맹 중립외교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티토」주의를 바탕으로 국내적으로는 안정된 정권을 유지했고 국제적으로 제3세계 지도자로서 독특한 「이미지」를 풍겨왔다. 「스탈린」이래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의 소련과의 반목, 50년 이후 비동맹 열풍은 그의 성가를 높였다.
청년기부터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하며 2차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대한 「빨치산」 활동을 지도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던 그는 45년 종전과 함께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유고」는 다행히 「나치」가 패퇴할 때 소련점령군을 능가하는 54개 사단의 「빨치산」부대를 보유했던 탓으로 다른 동구국가들과는 달리 소련에 대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크렘린」에 반기를 든「티토」를 굴복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48년 소련주도하의 「코민포름」 (공산당정보국)에서「유고」를 축출하고 동구권으로부터의 경제봉쇄 및 외교·군사적인 압력조치를 취했다.
이 때문에 국내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서방측의 경제원조를 모색하면서 국가·경제기구의 재편에 착수했다.
51년에는 소련을 모방해 만들었던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헌법(45년 제정)을 개정하여 수상이었던 「티토」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개헌과정에서 전통적인 「마르크스」이론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 공장노동자의 경영참여, 집중화현상의 경제의 재 분화, 가격·임금·투자에 자본주의적인 시장기능 가미 등 국가관· 경제이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등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면서 「티토」는 대 소국간의 평등 성을 주장하며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자기네 사정에 맞는 노선을 채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76년6월의 「유럽」 공산당 대회에서도 고수되어 몇몇 서구 공산당의 지지를 얻어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대국의 지배에 대한 그의 반항은 비단 소련뿐 아니라 서방대국에 대해서도 나타났다. 50년대 「네루」 「나세르」「수카르노」와 함께 비동맹 운동을 선도해온 그의 중립노선이 이러한 그의 신념을 드러내준다.
「티토」가 표방해온 외교의 기본원칙은 「적극적 평화공존」과 「비동맹」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서 군사 「블록」의 존재가 국체긴장의 주요 원인이며 이 두 「블록」이 다른 국가의 의사를 무시하고 세계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비동맹운동으로 이 「블록」을 해소하자는 구상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시달려 온 「유고」의 경험에서 얻어진 이념이라 할 수 있다. 「티토」가 이처럼 저항의 지도자로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빨치산」활동으로 배양된 결단성, 현실에 대한 적응성 및 육체적인 「스태미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80세가 넘어서도 l년에 5∼6차례씩이나 외국 나들이를 해온 그는 78년에는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한중재역할까지 자청할 만큼 집권이래 1백7O여 회에 이르는 방문외교를 즐겼다.
이렇듯 동서양진영사이를 교묘히 헤엄쳐온 그의 정력과 수완이 30년이 넘도록 「유고」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티토」 이후의 국가적 통일성과 독립유지여부가 「유고」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국가적 단결을 지킬 「티토」만한 경륜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없다는 것이 「유고」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파리 주원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