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경리, 2년 넘게 일 안 해도 정규직 길 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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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인 L사에 근무하는 480여 명 가운데 20여 명은 계약직(기간제) 근로자다. 물품을 포장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을 한다. 핵심 업무는 아니지만 없앨 수도 없는 업무다. 이들의 계약기간은 대체로 1~2년이다. 기간제 근로자 보호법에 따라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부담을 피하려는 의도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숙련이 필요 없는 단순업무인 데다 주문물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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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인력을 근무기간과 관계없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할지 모른다. 정부가 2년 이상 유지되는 업무에 배치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10월 중으로 만들어 기업 동참을 유도키로 해서다. 2013년부터 공공부문에 적용하고 있는 것을 민간부문으로 넓히는 것이다. 회사마다 사정이 달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마트 판매원과 서무 보조, 비서, 경리, 물품 포장 같은 직종이 대상으로 거론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예산을 더 확보해 집행하면 되는 공공부문과 달리 민간부문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동안 정부 내 중론이었다. 그래서 기업에 대해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쪽으로 정책을 펴 왔다. 2기 경제팀은 이 생각을 뒤집었다. 고용형태를 직접 제어해 정규직 전환을 유도함으로써 차별의 싹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형준 노동정책본부장은 “사실상 법에 따른 기간제한(2년)에다 업무제한(고용사유)까지 규제를 더하는 것”이라며 “고용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고용시장이 경직돼 국정과제인 고용률이 떨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런 우려와 비판이 나오는데도 이 제도를 확산시키려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정규직이 많아지면 고용과 소득이 안정돼 소비를 살리고, 경제의 기초체력을 다질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말은 자율적 ‘가이드라인’이지만 정부의 의지는 강하다. 가이드라인을 만든 뒤 곧바로 비정규직이 많은 사업장과 준수 협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기업들은 지난달 말부터 고용형태 공시제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해 공시하고 있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참여한 고용형태 공시제가 정규직 전환정책의 발판이 되는 셈이다.

 비정규직 사용제한 대상 업무에 대한 실태조사도 시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남용 방지와 차별개선을 위한 종합대책’을 10월 중 내놓기로 했다. 12월에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파견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도 개정할 방침이다. 개정안에는 고용기간이 2년 이내인 기간제나 파견, 시간제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에 불어나는 임금의 일부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관련된 분야에는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9월에는 1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기업일자리 창출지수를 공표한다. 기업별 고용증가율과 규모가 큰 100개 기업을 공개하는 것이다. 또 30인 이상 기업에는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돼 있는 노사협의회에 비정규직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간제 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전면적인 법개정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런 정책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업을 달래기 위한 당근도 내놓았다. 32개 업무로 한정된 파견업종 일부를 확대키로 한 것이다. 농어업 분야와 55세 이상 고령층, 특허전문가와 같은 고소득 전문직의 파견을 허용키로 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고소득 전문가는 상식적으로 파견을 받아 쓸 일이 없고, 숙련도가 떨어지는 고령자도 마찬가지”라며 “결국 농어업 분야로 파견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기업과 별 상관이 없는 분야”라고 지적했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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