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놓쳐 진통 긴 포르투갈 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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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0년대에 「유럽」에서 독재의 굴레를 벗어 던진「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세 나라 중에서 「포르투갈」은 가장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볼셰비키」혁명을 흉내낸 초기의 변혁을 겪은 다음에 인구9백만의 이 소국은 온갖 정치실험을 거치면서 5년 동안에 두 차례의 「쿠데타」, 한차례의 「쿠데타」미수, 세 차례의 총선과 10차례의 내각교체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어느 정당도과반수의 지지기반을 얻지 못한 채 80년의 헌법개정. 81년의 두 번째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3년만에 시든 카네이션 혁명>
74년 4월25일 군인들이「리스본」시가로 몰려와서 50년 독재아성을 허물어뜨렸을 때 시민들은 「카네이션」꽃 다발을 안기면서 열광으로 환영했다. 「카시아스」정치범 형무소의 문이 활짝 열리고 정치범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은 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비밀 경찰(DGS) 요원들로 채워졌다.
정부기관지「에포카」가 불에 타고 「미세리코르디아」가의 언론검열국은 파괴되었다. 관제노조는 해체되고 순수한 노동자들의 조직이 새로 탄생했다. 거대한 농장은 집단농장으로 바꿔지고 2백54개 큰 회가 국유화되었다.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제일의 목표로 명시한 헌법이 혁명2년만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3년이 지난 오늘 많은 것이 변했다. 사회당과 공산당대신 우파정당의 연합세력인 민주연합이 제1당(선거서 42%획득)으로 등장했고 혁명당 시국외로 망명했던 대기업의 간부들은 한 사람 두 사람 귀국하기 시작했으며 75년에 집단화했던 20만km의 농지중 대부분이 옛 지주들에게 되돌려졌다.
이제「포르투갈」은 지배적인 경치세력이 미처 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남부)과 그 동안의 변화를 원상 복구하려는 세력(북부)사이에 긴장이 높아가고 있다. 혁명초기 극좌로 쏠렸던 시계추가 중도노선에 안정되느냐, 「살라자르」시대의 극우로 반전하느냐는 위험한 고비에 서 있는 셈이다.
「포르투갈」의 진통은 탈독재과정이 당연히 시작되었어야할 시기에 시작되지 못한데서 온 부작용에서 연유했다고 지적되고 있다. 「스페인」이「프랑코」사망 6개월만에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한데 비해 「포르투갈」의 지배계층은 「살라자르」가 사망한 후 4년 동안을 독재자 없는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무리를 범했다. 개혁에의 일반적 여망이 오랫동안 물리적으로 억압되어 오는 동안 축적된 정치압력은 혁명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적인 정치세력 등장 못해>
그리고 혁명이 왔을 때 그 주체를 정치세력이 아닌 군부세력이 말게 된 것이 두 번째 진통요소가 되었다. 「살라자르」의 폐쇄적 통치방법 아래서 반대파 정치인은 모두 국외로 망명했거나 감옥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바통」을 이어 받을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의 불재속에서 혁명을 주도한 영관급이하의 군인들은 유치할 정도로 정치이념면에서나 정치기술면에서 미숙했고, 이 때문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들의 혁명이념은「아프리카」에서 식민전쟁을 하면서 적인「아프리카」민족 해방운동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들은 「게릴라」로부터 노획한 혁명지침서를 보다가 거기에 감화되기도 하고 군사학교에서 적에 대한 정치교란법을 공부하다가 「마르크시즘」에 물든 인물들이 있다.
혁명위원회는 그런 구호의 연결 정도의 초보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가지고 중산층이 형성되지도 않고 국민의 3분의1이 문맹인「봉건사회」에 위로부터 뒤집어씌우는 민중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국제정세면에서도 「나토」의 전략요충인이 곳에 노골적인 공산혁명을 실현시키려할 때 얼마나 엄청난 국제적 압력에 부딪칠 것인지를 충분히 계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군인들은 정치를 독점하려했다.

<어설픈 「볼셰비즘」흉내도>
모든 정당대표들로부터 군이 3년 내지5년 동안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냈고 수상을 임명함에 있어 선거결과는 「참고」만 하겠다는 양보도 받아냈다. 헌법을 입안하는데도 군의 초안을 제시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헌법은 『군부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전환에 필요한 조건을 보장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갖는다』(2백73조)는 조항을 포함하게 되었다. 정치활동은 허용하되 최종결정권은 군이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첫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정당들과 함께「군사운동」(MFA)도 참여했다. 군부를 지지하는 사람은 백지투표를 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결과 백지투표는 7%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부의 소강이 와해되었다. 그것은 엄격한 상하위계를 생명으로 하는 군이 정치에 깊이 관여한데서 온 필연적인 대가였다.
장군과 장교와 사병이 같은 자리에서 혁명정책을 토의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장군인 대통령이 중령인 수상을 해임했을 때 이에 불복한 경우, 「리스본」수비군 사령관을 지방으로 전출했을 때 수비군 사병이 들고일어나 전출명령을 취소시킨 경우, 좌파인 공수단이 우파인 보병사단과 충돌한 경우 등 군부조직에 극한적인 혼란이 왔다.

<우파장성 역쿠데타로 잠잠>
이런 혼란은 75년11월 우파 장성들의 역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쿠데타」호 강자가 된「에아네스」장군은 군을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군의 장래뿐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 21만 대군을 2만6천명으로 대폭 감축시키고 정치에 관여해온 좌파군인들을 가차없이 전역시켰다.
동시에 군부혁명주체인 MFA의 군사행동대 「코프콘」부대도 해체시키고 군사혁명위원회의 기능도 후퇴시켰다.
5년간의 혼란이 정치군인의 퇴장으로 막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좌파혁명에 대한 지나친 반작용으로 우파정치인들이 새로운 충돌을 몰고 올 것인지가 현재로서는 가장 큰 관심사다. 그래서 금년의 헌법 개정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모든 시선이 쏠리고 있다.【런던=장두성특파원】
▲1970·7·27독재자「살라자르」사망
▲1974·4·25군사「쿠데타」로「스피뇰라」장군대통령 취임
▲1975·3·11「스피뇰라」주동의 반혁명「쿠데타」실패, 「스피뇰라」「브라질」로 도망
▲1975·4·25 총선으로 제헌의회구성
▲1975·11·25 우파군사「쿠데타」로 「에아네스」장군주도권 장악
▲1976·4·2 민주헌법 제정
▲1976·4·25 총선
▲1976·6 대통령선거
▲1976·7·14 「에아네스」대통령취임
▲1976·7·23 「수아레스」사회당당수수장취임
▲1979·11·30 총선으로 우파의 민주연합 득세, 「카르네이로」수상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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