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 이라크전 이후 세계 경제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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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라크 전쟁이 조만간 끝날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는 안개 속에 있다. 미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경제가 여전히 부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북핵 문제까지 겹쳐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다. 중앙일보는 트라이래터럴(3자)위원회에 서울회의 참석차 방한한 스탠리 피셔(전 국제통화기금 수석부총재) 시티그룹 부회장과 리처드 쿠퍼(전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총재) 하버드대 교수를 초청, 사공일(司空壹)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의 사회로 특별 좌담회를 마련해 이라크 전쟁 후의 세계 경제 전망을 들어봤다.

3자위원회는 유럽, 아시아.태평양, 북미 지역의 명망있는 인사들이 참여해 세계적인 현안을 논의하는 국제 민간기구로 1973년 창립됐다.

▶사공일=그동안 세계 경제를 둘러싼 가장 큰 불확실성으로 지목되던 이라크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전쟁 이후 세계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나.

▶스탠리 피셔=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각각의 가정에 따른 시나리오도 다양하게 나왔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단기전으로 끝나는 것이 확실시된다. 다만 테러 위험이 여전히 남아 있어 전쟁이 끝나더라도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중요한 과제는 중동 지역의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제 유가는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세계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리처드 쿠퍼=전쟁 이전에는 혹시라도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내 정유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라크 미사일 공격의 사정권에 있는 쿠웨이트.이란 등 주변국들의 정유 시설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유전 시설은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가장 큰 불확실성이 아주 좋은 방향으로 해결된 것이다. 앞으로 이라크 정유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도록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면 원유 공급이 안정되고 유가도 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사공=미국 경제는 어떤가. 이라크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단기간에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 적자도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피셔=최근 들어 소비자 신뢰지수 등 각종 지표들이 좋게 나와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반기부터는 경제 성장률이 3~3.5%의 회복세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회복세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침체의 골이 깊지 않았던 만큼 회복세도 강하지 않을 것이다. 재정 적자는 상당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공화당이 추진하는 세금 감면과 더불어 장기적으로 대규모 재정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쿠퍼=가계 소비가 앞으로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저축률이 아주 낮은 상황에서 가계의 씀씀이가 늘어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은 금리가 떨어지면서 주택담보 대출의 부담이 줄어든 덕분에 주택.자동차 구입 등 소비가 늘어나 경기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재정 적자가 커지는 것은 금리를 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선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이처럼 채권 공급이 늘어나면 채권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의 빚 부담이 커져 소비를 위축시킬 수 있다.

▶사공=달러 환율의 움직임은 어떨 것으로 보는가. 미국은 그동안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강한 달러' 정책을 고수해 왔지만 최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 제조업체들은 강한 달러로 수출 경쟁력이 약해져 경상수지 적자가 커진다며 정책의 수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피셔=지금과 같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면 수출 수요가 늘어나 경상수지 적자가 완화될 것이다. 환율은 다른 나라 경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므로 유의해야 한다. 유럽으로서는 달러 약세, 유로 강세가 나쁘지 않다. 유로 강세로 인해 물가가 안정되면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를 내리기 쉬워진다. 금리 인하는 유럽 지역의 취약한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 경제를 위해선 일본 정부가 달러 약세를 용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쿠퍼=약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경상수지 적자가 반드시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경상수지 적자로 미국에서 빠져나간 달러는 자본투자로 되돌아오고 있다. 미국에 대한 투자가 안전하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현재 세계를 둘러보면 미국 외에는 마땅히 투자할 만한 곳도 없다. 따라서 달러 약세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면 외국 투자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환율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들이 돈을 빼가려고 한다면 금융시장에 커다란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사공=아시아로 눈을 돌려보자.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반면 일본 경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양국 경제를 어떻게 보는가.

▶피셔=최근 중국 경제의 성장세는 눈부실 정도다. 물론 중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를 고려해도 대단한 수준이다. 다만 금융 부문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다. 경쟁력이 없는 국유 기업들을 정리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달러에 거의 고정돼 있는 중국 위안화를 변동 환율제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 멕시코.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경제위기를 보면 고정 환율제를 고수하는 것이 위기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구조조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또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한 효율적인 통화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달 취임한 후쿠이 도시히코(福井俊彦) 일본은행 총재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쿠퍼=중국 경제는 1950~60년대의 일본이나 70~80년대의 한국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도 성장의 이면에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조건으로 5년간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하기로 했다. 수입 자유화는 시간 문제라는 얘기다. 위안화 환율은 현재 상당히 저평가돼 있다. 당장 완전 자유화는 어렵겠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변동 환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일본 경제는 언젠가는 회복하겠지만 매우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회복 전망이 어둡다. 아마 5년 정도는 더 걸릴 것으로 본다.

▶사공=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지난해까지 높은 성장세를 이어왔으나 최근 들어 주춤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와 조언을 부탁한다.

▶피셔=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회복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금융 부문은 아주 튼튼해졌으며 기업 구조조정에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망할 기업은 망하고 살아남은 기업들은 체질을 개선해 더욱 건강해졌다. 현재 당면한 문제는 지난해 급증한 가계 부채를 어떤 식으로 연착륙시키느냐에 있다. 특히 신용카드사들의 문제가 심각하다. 잘못 건드리면 충격이 클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북한 핵개발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북핵은 안보 문제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쿠퍼=당분간 한국 경제에는 북핵 문제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잘못 풀릴 경우 경제에 타격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북핵 문제로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국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중국도 고도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입장이다. 북한이 핵을 갖기를 원치 않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중국과 긴밀히 협조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정리=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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