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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도 통하는 오선지의 지배자 그를 만난 건 행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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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호 06면

“걱정 마, 저 분은 4악장을 워낙 느리게 지휘해서 리허설 없이 초견(初見)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들으면서 악보를 받아적을 수 있는 템포라니까!”

1930~2014, 거장 로린 마젤을 보내며

2000년 스위스 루체른.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인 나를 동료 연주자가 위로했다.

걱정은 리허설 때 시작됐다.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은 1, 2악장, 3악장 스케르초, 5악장 피날레만 좀 해보고 4악장은 아예 없는 것처럼 리허설을 진행하더니 시간이 남았는데도 무표정하게 오른손만 들어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동료의 위안은 효과가 없었다. 여기는 루체른이고, 오늘 저녁 연주할 곡은 말러 5번이고, 연주는커녕 한두 번 들어본 게 전부였다. 당시 나는 베를린에서 오페라를 일 년하고 온 게 전부인 그야말로 초짜였다.

4악장 아다지에토를 안 해보고 무대에 올라가는 게 걱정스러웠다. 느린 악장은 템포를 비롯해 호흡과 프레이징, 음색, 활 속도 등이 중요한데, 그런 것들은 혼자 준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럴 때 믿을 건 하나밖에 없다. 지휘자다. 4악장의 첫 쉼표부터 다 세면서 마에스트로를 놓치지 않고 봤다. 그리고 마젤의 지휘라면 곡을 몰라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프가 셋잇단음표를 연주하는 것도 지휘에서 보이고, 다음 마디 전에 바이올린이 약간 느려지는 것도 보였다. 악보를 읽고, 지휘를 보고, 내가 연주할 순간에 연주하고, 움직임이 빨라지면 따라가고, 느려지면 활을 늦추고 다음 음에 도착하기 전에 기다렸다. 지휘봉이 선을 그리다가 아주 잠깐 멈추면 나도 숨을 쉬었다. 이후 말러 5번을 여러 번 했고 잘 알게 됐지만 그날 무사히 연주를 마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했는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젤의 지휘는 기술적인 면과 정확도에서 최고였다. 그와 연주한 많은 동료가 공감한다. 그는 내가 음악의 흐름 속 어디에 있는지, 또 아무리 작은 음표라도 그 음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항상 보여주었다. 악보를 사진처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드문 기억력의 소유자여서 항상 암보로 지휘했다. 기억력은 완벽해서, 리허설 때도 악보를 찾아본다든가 잘 모르면서 대충 아는 척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뮌헨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 마젤과 오케스트라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본인은 리허설이 필요 없는 사람인데다가 자기 일만 할 뿐, 단원들과의 소통이라든가 연주자 개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여지를 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상임 지휘자에게 자부심과 성취욕이 강한 오케스트라가 실망했을 거라 짐작한다. 더구나 임기는 2002년까지로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니 서로 데면데면 했다.

결국 나는 그와 말 한번 따로 해본 적 없이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그러나 그와 일하면서 나는 지휘자를 절대 신뢰하는 기본 태도를 배웠고, 리듬이 겹칠 때 음의 시간적 순서를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지금 제일 중요한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파악해야 하고, 내가 중요할 때와 아닐 때의 소리는 완전히 다르게 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짧은 음이라도 그 울림에 시간과 공간을 줘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2011년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나선 마에스트로를 객석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했다. 등이 곧고 양 어깨는 완벽하게 균형 잡힌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 날이 서게 다린 맞춤 양복까지.

하지만 지휘는 달라졌다. 전처럼 빈틈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자신감이 넘쳐 오만한 점도 사라졌다. 소리는 따뜻해졌고, 가끔 음악이 신비롭게 통제를 벗어났다. 어느덧 80세가 넘은 로린 마젤이 들려주는 말러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우고 넘치는 순간에도 숨 쉴 여유가 있고, 더 큰 것도 넉넉히 품을 듯한 공간이 있었다. 8번 교향곡을 듣고 약간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나온 것이 마지막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아홉 살에 데뷔해 평생 지휘를 하다 여든 넷으로 떠나신 분. 고맙습니다. 당신과 연주했고 또 당신의 연주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러나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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