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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군웅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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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7년에 들어 우리나라 영화계는 두개의 단체로 갈라져 있던 한국영화제작자협회와 대한영화제작가협회가 통합,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로 발족했다. 새로 발족된 제작가협회는 회장에 정화세, 부회장에 오의겸 오치성, 이사에 방의석 박구 김보철 방대훈 정홍거 최일 등을 선임했다.
또 한국영화문화협회란 단체도 새로 발족했다.
이 협회는 「아시아」 재단이 기증한 촬영기와 자동현상기를 관리하고 정능에 「스튜디오」를 세워 모든 영화인들에게 실비로 제공했다.
57년은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20주기였다(37년 8월9일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 춘사의 20주기를 맞아 영화인들은 추도식을 가졌으며, 김소동 감독은 이성춘 촬영으로 춘사20주기기념작품으로 『아리랑』을 제작, 개봉했다. 그때의 출연자는 장속휘 조미령 윤달춘 김동원등이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57년 7월10일부터 3일간 문총회관에서 영화강좌를 개최했다.
강좌 내용과 연사를 보면▲『미국영화에 나타난 현대 연애관』 =이진섭▲ 『서부활극과 개척정신』 =황영빈▲ 『 「프랑스」 영화의 비극성』 =유두연▲ 『영화의 윤리성과 사회성』 =이봉내 ▲ 『한국여배우론』 =허백년▲ 『배우가 되려면』 =김소동등이었다.
이 강좌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강좌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청중들도 연일 대만원을 이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보여주었다.
이 해 동경에서 제4회 「아시아」 영화제가 열려 한국이 출품한 이병일감독의 『시집가는날』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이 상은 우리나라가 받은 최초의 해외영화제 수상이었다.
『시집가는 날』은 56년 11월27일 수도극장에서 개봉됐던 영화. 임병호촬영, 임원직음악에 조미령 이지 김승호 김칠성등이 출언했다. 이 영화는 64년 태국에도 수출돼 호평을 받았다.
이강천감독의 『백치아다다』도 출품되었으나 입상하진 못했다.
58년부터 우리나라 영화는 중흥기로 접어든다. 이때부더 64년까지 6년동안 우리나라 영화는 재 궤도에 접어들어 전성기를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우선 제작 편수를 보면, 57년의 37편에서 58년엔 74편으로 부쩍 늘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영화제작회사는 모두 72개. 74편 제작에 영화사가 72개였으니, 우리나라 영화 중흥기는 어찌 보면 제작사들의 군웅할거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58년엔 또 우리나라 최초의「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이 개봉돼 국산영화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수도영화사가 제작한 『생명』은 이강천감독, 김학성촬영에 최성진 문정숙 김방호 김신재둥이 출연했다.
수도극강(지금의 「스카라」)과 세기극장(지금의 서울극장)에서 동시 개봉되었는데, 첫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만큼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이병일감독의 『자유결혼』이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5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소년특별연기상(아역의 박광수군)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하유양의 희곡을 영화화한 것으로 김승호 조미령 최은희등이 출연했다.
또 김수용이 『공처가』로 감독 「데뷔」 했고, 최지희가 『아름다운 악녀』로, 이대엽이 『나 혼자만이』로, 전영선이 『종목 없는 비극』에서 아역으로, 김혜정이 『봄은 다시 오려나』로, 안성기가 『한많은 청춘』에서 아역으로 각각「데뷔」, 영화계에 새 얼굴이 쏟아졌다.
합작영화도 활발해져 『그림자사랑』(김화낭감독)· 『이국타원』(전창근감독)이 각각 「헝콩」과 합작으로 제작됐다.
시공관(옛 명동국립극장)에선 배우들의 장치인 제1회 『「스타」의 밤』이 열려 화려한 무대를 장식했고, 문교부는 제1회「우수 국산영화상」을 제정, 시상했다.
그대의 수상자는 ▲감독상=조긍하(곰) ▲남우주연상=김진규(나 혼자만이)▲여우주연상=최은희(어느 여대생의 고백)▲남우조연상=최남현(자유결혼) ▲여우조연상=하정순(어느 여대생의 고백) ▲촬영상=김형근 (초설)등이었다. 이렇게 우리 영화가 활발해진 58년, 나는 『청춘비가』란 영화를 감독하게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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