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감성을 생명 있는 유기체로 결합-김춘수의 『버찌』|흰눈의 「이미지」통해 시의 본질을 추적-황동규의『겨울의 빛』|대지와 싸우는 인간의 애환 소박하게 묘사-이유경의『아버지와 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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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들이 예술가운데서 단순히 어떤 중요한 「메시지」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문명가운데 있어서 예술의 위치를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아 『햅리트』같은 위대한 작품에서 『일을 미루는 것은 시간의 도둑이다』라는 「메시지」 만을 기대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예술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들이 예술에서 정말 구할 수 있는 것은 교훈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훌륭한 경험이다. 예술은 우리들에게 지극히 선택되고 집약적인 경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방대한 「에너지」를 확산시키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들을 구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 우리들에게 주는 심리적인 효과다. 예술 가운데서의 깨끗하고 통일된 경험은 우리들 마음 가운데서 「Ⅰ·A·리처즈」가 말한 이른바 「심리적 반응」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예술적인 경험에 의해 향상된 「마음의 충동」은 일종의 조형적인 것으로서, 그것 자체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 효과를 다른 충동들에까지 확대시킨다.
툭 다른 예술의 「장르」보다 지각과 인식작용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시예술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김춘수의 『버찌』 (문학은상)와 황동규의『겨울의 빛』(문소과 지성)은 이 달에 우리들의 주목을 크게 요구한다. 시인 김춘수는 주자 빛으로 투명하게 익은 한 알의 버찌들 만화경으로 해서 격조 높은 예술의 정신세계를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까지 확대시켜 놓고 있다. 신비로운 막자 속에서 발견한 「이미지즘」, 수정처럼 맑은 언어의 간결한 끌질, 그리고 은빛처럼 번쩍이는 시신의 빛은 이 시에서 감각을 해체시키지 않고 지성과 감성을 생명 있는 유기체로 결합시키고 있다.
시인이 노자를 읽다말고 바라본 그의 시선 속에 들어온 『「릴라」꽃 같은 보얀/비에 젖은 달』은 이러한 그의 연금술을 충분히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비에 젖은 달」은 위험한 감성이지만, 그것이「릴라 꽃」의 흰색이 상징하는 지성에 의해 여과될 때 미의 은반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버찌」의 시세계가 죽음과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예술로 이룩한 인문의 공간이다.
황동규의 『겨울의 빛』역시 주제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과 「스타일」에 있어서「백연」가운데서 인문적인 것을 예술의 힘으로 구현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감정을 가능한 한 빙점에까지 제거하려고 한 이 시는 「겨울의 빛」 과 「지성의 빛」을 일치시키면서 차갑고 흰눈의「이미지」를 통해 시의 본질과 인간의 의미를 원형적인 문맥 속에서 추적하고 있다.
시인이 「잠긴 창」을 열고 내다본 어둠의 대지위로 내리는 흰 눈은 『하회를 싸고도는 낙동 강물』과 물리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눈과 「하회」의 물과 다른 것은 그것이 「여섯 개의 수정깃」을 달고 어둠을 녹이는 「하얀 결정체」란 것이다. 인문의 지성을 상징하는 흰 눈송이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샤머니즘」과도 같은 자연적인 질서에서부터 벗어나서 그것대로의 가치, 즉 인문가치 내지 지적·예술적 가치를 주장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눈은 『어둠을 자기 몸만큼씩 흔들어 녹이고/끝내는 몸뚱어리까지 녹여 없애고/잘고 하얀자들』로만 날아다닌다. 그래서 그것은 시인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안 보이는 부석사가 되어 떠다니다/보이는 부석사』라는 예술의 눈과 만나게 된다.
창의 안팎, 눈 빚과 물빛, 흰 꽃과, 흰나비 등의 「이미지」를 조형적인 언어로 결합해서 이룩한 이 예술의 얼음탑은 황동규의 시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시에 주제와 형식을 완전히 융합시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 깊게 보여주고 있다.
이유경은 『아버지와 흙』(월간중앙) 에서 대지와 인문과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인문의 숭고한 애환을 소박한 서정과 감동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인간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패배시킬 수는 없다』는 강렬한 주제의식과 자연의 배반에 대한 인간의 슬픈 반항을 밀물처럼 남고 있는 이 시는 인간의 의지, 죽음의 세계에까지 뻗치고 있다. <서강대교수·문학평론가><이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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