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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이주, 분단, 6·25 … 북 강압체제, 남남갈등의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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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스탈린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중국의 만수무강 휘호 선물(오른쪽). 스탈린이 그때 모스크바에 온 마오쩌둥과 집무실에서 얘기하고 있다. 스탈린 왼손가락에 담배, 마오쩌둥은 왼손에 책을 쥐었다. 지도자 서열을 시사한다.

스탈린은 한반도의 비극을 설계했다.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그의 첫 연출이다. 분단, 공산 위성국 북한 수립, 한국전쟁에도 스탈린의 기획과 음모가 들어있다. 전시 홀은 7개다. 전시품은 800여 점(4만7000여 점 보유). 진열장 속에 한글이 보인다. ‘이·쓰딸린 저작집 1’-.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전집의 번역책이다. 북한 관련 전시품은 그것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품은 드물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승자다. 그는 히틀러를 궤멸시켰다. ‘대조국수호 전쟁’ 홀은 승전 신화로 장식된다. 크렘린 붉은 광장 승리 퍼레이드 사진, 수훈갑 주코프 원수가 기증한 T-34 탱크 전기 스텐드, 병사들의 비장한 결의, 대원수 스탈린의 득의의 미소-. 옆 전시실에 스탈린 데스 마스크가 있다. 그것은 승전 홀과 어울려진다. 박물관은 스탈린 성지(聖地)가 된다.( 전시공간 규모는 1,550)

 얄타회담 사진들도 붙어 있다. 1945년 2월 흑해 휴양지 얄타에서 빅 3(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영국 처칠 총리)는 외교 게임을 했다. 나는 2010년에 가봤던 얄타회담 장소인 리바디아궁을 떠올렸다. 루스벨트의 병색은 박물관 사진에서 뚜렷하다(두 달 뒤 사망). 얄타회담은 한반도 분단의 뿌리다. 그의 야심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장이었다. 루스벨트는 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박물관 밖에 열차 객실이 전시돼 있다. 스탈린이 얄타, 테헤란 회담장에 갈 때 탔던 전용객실이다. 초록색 객차 번호는 ФД 3878. 소련 국가 휘장이 붙어 있다. 무게 83t의 방탄객차. 집무실, 서재, 화장실, 부엌이 있다. 움직이는 크렘린이다. 객차에 스탈린 체취가 남은듯하다. 그 체취에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절망이 담겨있다. 그 순간 스탈린 유품은 심하게 거슬린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외 열차 방문은 스탈린 벤치마킹이었다.

 1949년 12월 스탈린 70회(실제 71세) 생일 기념행사가 모스크바에서 있었다.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도 참석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에서 보낸 축하 휘호가 선물 전시실을 장식한다. ‘萬壽無疆 慶賀 斯大林同志七十壽辰’(만수무강 경하 사대림동지칠십수진)-. 사대림은 스탈린. 제2야전군 정치위원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스탈린과 마오가 함께 있는 자수 그림은 흥미롭다. 마오는 중·소 우호조약 체결에 매달렸다. 그림은 서열을 드러낸다. 안내원은 "스탈린은 냉전시대 공산세계 대부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수락했다. 마오는 중국 군대를 한반도에 진입시켰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싸움을 부추겼다. 그 사이 그는 동유럽의 지배권을 강화한다. 동족상잔의 참혹함은 계속됐다. 그가 숨진 4개월여 뒤 한국전쟁은 종료됐다.

 그의 그림자는 한반도에 질기게 남아 있다. 북한체제의 강압과 공포는 스탈린 방식이다. 대회장에 끝없는 박수 소리는 그 잔재다. 한국의 남남갈등 속 극렬좌파 행태에 그 잔영이 있다. 계층 가르기, 증오심 키우기, 거짓 선동, 진실 왜곡은 볼셰비키 투쟁 전략이다.

 박물관에서 나는 25년 전 현장 취재를 떠올렸다. 1989년 6월 소련 붕괴 2년 전. 야당 총재 김영삼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타슈켄트(현 우즈베키스탄)에도 갔다. 동포(고려인)들을 만났다. 그 장면은 신기한 감동이었다. 1930년대 소련 땅 연해주에 조선인 집단 마을이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군 침공을 경계했다. 조선인이 일본을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 1937년 그는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6000㎞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17만 명의 열차 집단이동과 죽음(2만5000명 사망 추정). 그는 의심의 뿌리를 제거한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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