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금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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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동난 중에 많은 영화인들이 납치됐다.
그 가운데 최인규 홍개명 박기채 김영화 방막준 안철영(이상 감독), 이명우(촬영), 김정혁(영화평론)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나는 서울에 남아 있었음에도 용하게 적의 마수에서 벗어나 9·28수복을 맞았다. 그래서 1·4후퇴 때는 제일 먼저 가족을 앞세우고 피난했다.
발길이 닿은 곳이 고향인 대구였다. 고향이라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친지나 친척이 아무도 없어 피난살이를 기댈만한 곳조차 없었다.
대구에 피난짐을 푼 나는 내당동이란 변두리 동네에 코딱지만한 방 한칸을 얻었다. 아내와 나, 그리고 세아이까지 다섯명이 비좁은 방에서 궁색한 피난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봇짐을 푼 다음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부산을 왕래했다.
당시 부산시창선동에 「금강」이란 다방이 있었다. 그곳은 피난온 문화인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때 그 다방에 자주 출입하던 예술인들은 소설가 김광주 유주현, 시인 조영암 양명문, 화가 김환기, 「시나리오」작가 이청기, 수필가 김소운(소운) 등이었다. 어느날 김소운과 마주 앉아「코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의 좌석 옆에 일본잡지 「중앙공론」(51년11월호) 한권이 놓여있었다. 무심코 허리를 굽혀 집어들고 책장을 넘겨보니, 김소운의 수필 『목근통신』이 일어로 번역돼 실려 있었다.
「중앙공론」은 일본에서 지식층 독자를 많이 갖고 있는 이름난 종합잡지였다. 거기에 한국의 수필가 김소운의 수필이 실려 있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무려 50여「페이지」나 할애돼 있었다.
제목이 『일본에 보내는, 사지』로 돼 있었다. 일어 번역도 김소운 자신이 직접 한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재미있어 앉은자리에서 두번이나 숙독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의 수필이「중앙공론」에 실리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김소운은 『목근통신』을 일어로 번역해 일본「팬·클럽」에 보냈는데, 그곳에서 잡지사로 연락해 실리게 된것 같다고 했다. 김소운의 그 유창하고 수려하면서도 박력있는 문장은 정말 일품이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의 글은 일본 지식인과 문학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나는 그뒤부터 김소운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으며 그가 발표하는 글은 모조리 읽고 있다.
밥벌이를 해야겠는데, 모든게 여의찮아 『행여나』하는 심사로 여전히 부산을 왕래했다.
하루는 「금강」다방에 들렀더니, 옛날 무성영화시절 유명한 변사였던 조월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았다.
조월해는 『이감독, 잘 만났소. 영화를 한편 해야겠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의 친지 중에 자금을 대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감독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일거리를 찾던 나로선 반가운 일이라, 즉석에서 좋다고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나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박계주의 단편소설 『어머니』를 각색하기로 마음먹고 부산에 피난와 있던 박계주를 찾아갔다. 그는『좋도록 하라』고 응낙했다.
나는 여관에 들 형편도 못되어 「금강」 다방에서 「시나리오」를 쓸 작정을 했다.
종이 한 묶음과 연필 한자루를 들고 「금강」다방의 구석진 자리하나를 차지, 소설『어머니』를 읽고 또 읽으면서「시나리오」를 써내러 갔다. 그때나 이제나 다방의 음악은 시끄럽기 마련. 하루종일 흘러나오는 구성진 유행가는 나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꼬박 2주일이 걸려「시나리오」가 완성됐다. 나는 이제 한고비 넘겼구나 하는 반가움으로 조월해를 찾아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조월해의 얘기는 그 전주가 형편이 달라져 영화제작을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보름동안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진 셈이었다. 그러나 전주가 못하겠다는데야 별 수 없는 노릇. 나는 다시 부산과, 대구를 방황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생활의 방편이 될만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채 허덕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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