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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역할에 기대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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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인지·전문지·종합지 등을 그럴싸하게 분류하기는 썩 어렵다. 종합지가 오락을, 전문지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동인지는 이념지향성이라고 말해지기도하지만 이런 견해 역시 정도의 차 일수도 있어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붓 수와 흑자경영을 자랑하는 미국의 「뉴요커」를 동인지라 규정하는 사람도 있고 보면 동인지적 성격규정도 여러 층의 질적 차이가 있어 그 나라의 문학적 바탕과 분리하여 파악필수는 없다.
다소라도 이런 모호성을 피하려면 이 말의 구체적 예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작단」이나 「반시」를 두고 동인지라 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우리가 동인지라 할 경우엔 문학지를 지칭함이 보통이다. 우리 근대문학이 국가상실과 더불어 시작되었기에 저항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우리 근대문학은 같은 운명을 걸어왔다. 「창조」(1919) 「폐허」(1920) 「백조」(1922)등의 순문학동인지의 출현은 저항민족주의 속에서의 한국문학건설의 기초를 놓은 주춧돌들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뿐 아니라 같은 20년대에도 「프로」문학 쪽의 「문예운동」이라든가 기타의 동인지를 볼 수 있으며 30년대에는 「시문학」(1930)「시인부락」(1936) 「삼사문학」(1934) 「단충」(1937) 등의 이름을 떠올릴 수가 있다. 해방이후에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여 김수영 등의「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 ,시인협회 「그룹」의 「현대시」(1957) ,김승옥 등의 「산문시대」(1962) 등 문학사에 남을 동인지가 있었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지속될 것이다.
동인지의 성격은 예술의 본질(성격) 과 흡사하다. 예술의 본질은 여러 각도로 설명되지만 그것이 현실타협을 철저히 거부한다는 점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예술의 기능이 일체의 물신적인 것· 제도화된 것·기성화된 것의 파괴에 있다는 것, 그러기에 부정의 변증법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가 만일 동의한다면 문학사에서의 끊임없는 동인지운동의 분출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것이 기성의「이데올로기」인 한도에서는 허위의식을 많건 적건 머금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를 억압하는 몫을 하는 것이다.
즉 물신의 자리에 「이데올로기」(관념형태)가 올라앉는다. 이를 파괴하여 인간의 본래의 모습(자유)을 회복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는 혁명과 예술이 있을 뿐이다. 혁명과 예술은 그러기에 현실부정을 그 원본성으로 갖는 것이어서 현장유지를 원본성으로 하는 생활이나 정치와는 반대쪽에 선다. 그러니까 동인지와 기성전문지·종합지와의 관계는 예술과 기성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와 대응된다.
종합지·전문지의 이념이나 정보제공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것이 기성의 상태 위에서 성립되어 있기에 일종의 「이데올로기」며 따라서 진정한 가치를 억압하는 몫을 수행하는 것으로 된다. 이를 파괴하는 힘은 동인지 내지 동인지적 정신에서가 아니면 나을 곳이 따로 없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너에게 슬픔을 주겠다>고 외치는「반시」의 목소리는 아름다웠고 문학을 통해 인생을 실천하고자 선언하는「작단」의 소리도 뜻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목소리도 조만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는 것, 그래서 먼저 그 목소리의 임자에, 그리고 독자에게 억압수단으로 작용하여 오게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역설적인 관계야말로 예술과 동인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리라. 철학에서 「비 정유의 정유」라고 유식하게 말하는 것도 앞에서와 같은 뜻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진정한 작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동인지라할 수 있다.
근자 우리문단에도 유상무상의 동인지 속출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과연 앞에서와 같은 본질적 고려가 얼마나 성취될는지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일 것이다. 따라서 2O호를 넘어선 광주의 「원탁시」를 비롯, 부산의 계간지「남부문학」,충남의「호서문학」,충북의 「내륙문학」, 최근에 나온 전북의「표현」등의 대현지방동인지의 발돋움도 눈여겨보아야 하지만 새로 탄생될 동인지에의 기대 또한 주목되어 마땅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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