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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길에 접어든 담양 죽물시장|보존책이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담양죽물시장이 해외에서는 널리 알려져 장날이면 외국관광객들이 구경삼아 찾아오는등 인기를 유지하고있다.
담양죽물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대나무「핸드백」·단추·각종완구·「브로치」등이 미국·일본 등지로 수출되면서 죽물시장의 명성이 해외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죽제품은 1947년 미국국제박람회에 수출품된 이후 76년엔 1백55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등 한때는 수출의 총아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종「플래스틱」홍수에 밀린데다 미국·일본 등지서 품질검사결과 이화명충이 발견돼 수입국에서 질겁을 하고 반품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대나무제품을 만들기전에 원료에 증기소독을 해야하는데는 시설경비가 가구당 60여만원씩이나 들기 때문에 생산지역 주민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출실적이 77년에는 88만「달러」, 78년에는 50여만「달러」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수출이 거의 안됐다.
그렇지만 이 죽물시장에는 아직도 연간 3백60여만점의 각종 죽제품이 출하돼 25억원 어치가 국내외로 팔려나가고 있다.
매월 2, 7일등 5일 시장이 형성되는 담양군 담양읍 객함리 영산강상류 백진천변 3천여평의 모래밭에는 군내 각마을에서 농가부업으로 만든 죽세공품들을 머리에 이거나 둘러맨 남녀 죽물장수들이 2천여명씩 물려들고 있다.
옛날에는 담양의 죽물장수를 만나면 호랑이도 겁을내 도망갔다는 말이있다.
그옛날 이른 아침부터 죽물을 산더미처럼 지고 담양장으로 가는 죽물장수를 보고 힘센 호랑이도 죽물강수가 자기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여기고 무서워 달아났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담양 죽물시장의 풍류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해방전후에는 대바구니·광주리·키·조리·삿갓·베개·쟁반·과실·그릇·부채·초롱·장기판·죽부인 등이 대종을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대나무「핸드백」단추 각종완구 의자「테이블」침대 등산모 화병 찻잔받침 양복걸이 등으로 바뀌었다.
죽물시장이 형성된지 3백여년동안 장 ·창고하나 없이 줄곧 천변모래밭위에 시장이 서지만 아직도 노천시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비나 눈이 내리면 맞기가 일쑤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비닐」로 덮어쒸우는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원래 대나무는 햇볕을 더무 오래 쬐면 금이가고 토막이 나기 쉬우며 눈비를 맞은 죽물은 그 독특한 노란색채가 흰색으로 변질하고 마디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애써만든 공예품이 원형이 뒤틀리고 망가지기 쉬워 담양죽물을 불신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장날마다 나오는 1천여 다발의 원죽도 마찬가지다.
원죽은 길이가 길고 양이 많아 눈·비가 내려도 덮을 수가 없고 창고마저 없어 옮길 수가 없다. 눈·비를 그대로 맞아야하며 햇볕도 그대로 쬐어야한다.
따라서 이 원죽으로 만들어내는 각종 죽세품의 품질이 좋을리가 없다.
또 담양죽물제작의 교육장 역할을 해온 죽세공예「센터」도 농촌지도소 청사로 바뀌어 전국에 죽세공예품제작기술을 전승시켜왔던 도강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담양죽물이 겪는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담양군당국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죽물시장에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1인당 50원씩 받아내고 있다.
한마을 79가구가운데 몇가구가 죽물공예품 만들기에 종사하고 있는 군내 무정면 동산1구 칠전마을 박대봉씨 (41)는 『시장시설 조차도 갖추어 주지 않고 시장사용료를 받아낸다는 것은 지나친 횡포』라고 지적하고『증기소독시설도 당국이 지원해서 보다 위생적인 제품을 수출하면 그 해택이 바로 나라에 돌아오지 않느냐』고 묻고 당국의 무성의를 나무랐다.
한편 담양군당국은 8백97평 규모의 원죽시장과 9백82평짜리 상품시장, 그리고 1백75개소의 상품진열대에 필요한 2천만원을 지원해 달라고 전남도에 건의했다.
아뭏든 사양길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담양죽물은 당국과 주민 협조로 다시「붐」을 일으킬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있다.
당국의 보다 계획적이고 능률적인 지원과 지도가 바람직하다.<광주=황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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