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승진 때 옷 벗는 관행 그만 뿌리 깊은 기수문화 바꿔야"

중앙일보

입력

산업통상자원부 정재훈(54) 산업경제실장. 지난해 4월 행정고시 동기인 김재홍(56) 성장동력실장이 차관으로 승진하자 스스로 옷을 벗었다. 5개월을 쉬다 산업부 산하기관인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원장으로 갔다. 기획재정부 최종구(57) 국제경제관리관도 행시 동기 추경호(54)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차관으로 부임하자 공직을 떠나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으로 옮겼다. 두 사례는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뿌리 깊은 기수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2년 단위의 순환보직제가 일반적이다 보니 보직에 관계없이 기수와 직급으로 서열이 매겨진다. 한 경제부처 1급 공무원은 “동기 밑에서 일하는 게 껄끄러운데다 승진을 기다리는 후배들 눈치가 보여 남고 싶어도 남을 수가 없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해당 부처로선 산하기관 등에 사퇴한 관료의 자리를 배려하는 게 관행이 됐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관피아(관료 마피아) 개혁을 위해선 이 같은 악순환의 사슬부터 끊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첫 단추는 직업공무원제의 정착이다. 순환보직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도록 공무원 조직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 김태유 교수는 “환경부 공무원은 평생 환경부 안에서 성격이 다른 업무를 번갈아 맡도록 할 게 아니라 기획재정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각 부처의 환경 관련 업무를 두루 거치며 자기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게 하면 직업공무원제가 자연스럽게 정착된다”고 제안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공무원이 한 분야를 오래 다루면 산하기관이나 민간기업과 유착될 우려도 있다”며 “비리가 적발되면 연금을 한 푼도 주지 않는 등 처벌규정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순환보직을 하는 공무원도 일본처럼 지금보다는 승진을 늦춰 정년을 채우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관피아 대책이 시행되면 50대 초·중반에 차관이 된 공무원들이 정년을 채울 길이 마땅치 않아서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된 일본은 장관 같은 정무직은 정치인이 맡도록 하되 직업공무원인 사무차관은 정년까지 공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일각에선 아예 행정고시로 상징되는 5급 공채를 확 줄이는 대신 7·9급 채용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관료 낙하산이 빈틈을 타 공공기관·공기업에 정치권 주변을 떠돌던 인사들이 밀고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보완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해 내부 승진 확대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내부 승진은 관료 낙하산 때문에 사기가 꺾인 공공기관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최고경영자(CEO)도 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줄 수도 있다. 지난달 발표된 2013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C(보통) 등급을 받은 한국석유공사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2년 연속 낙제점(2011년 D등급, 2012년 E등급)을 받았지만 공채 1기 출신인 서문규 사장이 부임한 이후 부실 공기업에서 벗어났다.

 내부 승진을 확대하려면 노조와 복리후생 등에서 이면 계약을 맺지 못하도록 사후 평가 시스템도 함께 보완해야 한다. 뒷거래가 적발되면 공공기관 평가 때 기관장 해임은 물론 직원 성과급 전액 삭감과 같은 강력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 CEO 선임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대신 경영 성과에 대해서는 CEO와 직원 모두에게 확실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장세정·김원배·박현영·강병철·유지혜·이태경·최선욱·윤석만·허진·김기환 기자,
뉴욕·런던·도쿄=이상렬·고정애·서승욱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