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에 오르기(3) | 김병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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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실업자 『아니, 도대체 저 양반에게 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천문가 (무거운 얼굴로 강을 바라본다. 잠시 후.)
천문가 『형씨. 』
실업자 『말씀하세요.』
천문가 (생각난 듯) 『형씨는 도대체 왜 이런 델 혼자서 어슬렁거리는 겁니까? 자살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실업자 『글쎄요.』
천문가 (눈을 빛내며) 『혹시 누군가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직하게 말한다면 이런데서 아무나 만나서 무슨 말이건 지껄이기 위해서….)
실업자 (생각해 본다.)
천문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실업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사실, 난…아내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천문가 『아내를?』
실업자 『네, 아내 말입니다. 미치게도 보고 싶었습니다.』
천문가 『형씨의 아내가 곧 이리로 오게 되어 있습니까?』
실업자 『아닙니다. 여기서 오늘 형씨를 만난 것처럼 두 달 전에, 나는 여기서 아내를 만났지요. 맞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내 생각이 날 적마다 나는 이곳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아주 지쳐 있었고 나는 지쳐 있는 채로 그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곧 결혼할 작정이었으니까요.』
천문가 『결혼을 하진 못했군요.』
실업자 『하지만 우린 부부였습니다. 증명하라면 증명할 수도 있어요.』
천문가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실업자 『아닙니다. 밝혀 두겠습니다. 형씨는 의심이 많은 분 같으니까. 감쪽같았지만 그 여자의 왼쪽다리는 의족이었습니다. 아시겠어요?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남편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 여자의 지독한 건망증에 대해서도 말해 볼까요? 영수증이나 증명서 따윌 모조리 잊어버리고 다니는 것은 물론 낮 동안 자기가 널어놓은 빨래를 밤에 보고는 질겁을 하고 놀라며 뛰어들어 올 정도였습니다. 때때로 밤에 돌아오면 나마저 낯설어하는데는 환장할 지경이었습니다. 늘 무슨 일엔가 꼴똘해 있었죠. 그녀는 자주 잠결에 의족께로 손이 가다가 그만 그 손가락 끝에 닿는 섬뜩한 고무의 감촉에 놀라 잠을 깨는 버릇이 있었어요.
천문가 『그만,…알겠습니다. 그 여자가 형씨의 아내라는 것 충분히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실업자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천문가 『어떻게…됐습니까?』
실업자 (고개를 꺾으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죽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천문가 (놀라며) 『저런!』
실업자 『사실 갑자기는 아닙니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는 몰래 스무알도 넘는 수상한 알약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여자가 죽으리라는 낌새를 챘기 때문에 나는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문가 『도대체 형씨의 아내가 죽은 원인은 뭘까요.』
실업자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끔찍이 사랑하던 한 남자가 오랜 요양원 생활 끝에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양원에 다녀온 다음날 그녀도 죽어버렸으니까요.』
천문가 『그럼 형씨의 아내에겐 딴 남자가?』
실업자 『조금 전 말했지 않습니까? 아내를 만났던 건 불과 두 달 전인데 나를 만나기 전에 그 여자에겐 이미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천문가 『결국 형씨의 아내는 완전한 형씨의 아내가 아니었군요.』
실업자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천문가 『그야, 사랑했기 때문에 강에 나오는 거겠죠. 형씨는 아마 아내를 화장해서 저 강에 뿌렸을 테니까.』
실업자 (몹시 당황하여) 『네?』
천문가 『왜 그러세요?』
실업자 (황급히) 『아닙니다. 맞습니다. 내가 화장하여, 아내를 저 강에….』
천문가 『…그런데 (은밀한 얼굴이 된다.)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형씨의 아내는….』
실업자 『………?』
천문가 (소리를 낮추어서) 『…창녀였지요?』
실업자 『뭐라고?』
천문가 『미안합니다. 이상하게도 형씨가 아내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단번에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실업자 『……….』
천문가 『어떻습니까? 틀림없지요?』
실업자 『……….』
천문가 『하지만 단지 나는 (더욱 은밀해져서)……그 사실이 형씨만의 비밀이었는지 어떤지만을 좀 알고싶을 따름입니다.』
실업자 『역시 (외면하며) 이런 얘기, 그러고 보니 형씨한테 처음 하고 마는군요.』
천문가 『역시 그렇군요. 됐습니다.』
실업자 『…?』
천문가 『이제 형씨는 형씨만의 비밀을 나한테 전부 털어 논 셈이 되는군요. (기뻐한다) 됐어요.』
실업자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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