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獨·러 "美 독주는 안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이라크 전쟁에 앞서 미국에 '노'라고 외쳤던 러시아.독일.프랑스가 다시 한번 대미(對美)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틀간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이라크 재건사업은 유엔이 주도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현 유엔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3국의 공동전선은 발등에 떨어진 두 개의 불 때문이다. 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을 단숨에 승리로 이끈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 위협이 되면 먼저 공격한다"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선제공격 독트린이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푸틴 대통령과 슈뢰더 총리 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 행정부 내 강경파들은 이라크 전쟁이 제3국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힘의 논리에 기초한 국제질서는 있을 수 없다"는 시라크 대통령의 주장은 미국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발등에 불은 미국이 이라크 재건사업을 독점함으로써 대(對)이라크 채권과 유전 개발권 등 기득권이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다. 러시아와 독일.프랑스는 사실 이라크에 대한 주요 채권국이다.

이라크로부터 직접 받아야 할 돈만 러시아와 독일은 각각 85억달러와 43억달러, 프랑스도 17억달러에 달한다. 후세인에게 돈을 빌려준 대가로 각종 이권을 선점했음은 물론이다. 이들 3국이 전쟁을 극구 반대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미 강경파들은 이미 "이라크 채권국들이 채권을 포기함으로써 이라크 재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채권 포기를 강요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 대해서는 "전쟁에 반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이라크 전후 처리는 승전국인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반전 3국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주체가 오직 유엔밖에 없다고 믿지만 유엔이 각종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현행 국제법이 분쟁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었다면 (이라크전처럼) 정당성 없는 결정은 없었을 것"이라며 유엔 체제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유엔의 새로운 규범과 기준을 마련해서라도 어떻게든 미국을 다극체제의 틀 안에 묶어두겠다는 게 반전 트리오의 계산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아 보인다. 우선 미국이 피를 흘린 만큼 대가를 차지하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대가를 위해 언제든지 피를 흘릴 준비를 하고 있는 미국에 맞서 반전 트리오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계속될 전망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