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5월 위기' 차단이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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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국내 금융기관들의 외화 차입에 비상이 걸리면서 '5월위기'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1천2백억달러를 넘고, 다음달 중순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 판에 무슨 오도방정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왜 달러를 빌리려 안달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외환보유액 못지않게 우리의 장단기 외채가 1천3백억달러나 되고 이 중 연내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5백억달러를 넘는다.

나라간 대차(貸借)관계는 갚고 또 빌리고, 돌려바꿈과 만기연장을 물 흐르듯 하며 평균잔액을 적정 수준에서 견지해야 한다. 지난 1월 이후 신규 해외차입과 롤 오버(만기연장)가 어려워지면서 이 흐름이 막히고 있다.

빌리는 금리는 높아지는데도 신규 차입은 고사하고 시중은행들의 롤 오버 비율이 50%가 안된다고 한다. 1997년 외환위기도 이 롤 오버가 막혔기 때문이다.

만기상환에 몰린 일부 은행이 국내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긴급 조달하면서 환율상승을 부채질하고,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풀어 환율방어에 급급한 상황이다. 외국인의 주식투자자금은 올 들어 1조7천여억원이 빠져나갔고 한국 투자비중 역시 계속 줄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실물경제가 5년 전 'IMF외환위기 수준'으로 얼어붙으면서 무역수지와 여행.이전수지 등 하나같이 적자로 돌아서고 있다.

거주자 외화예금이 1백40억달러로 크게 늘면서 달러 가수요를 부채질하고, 외환자유화로 국내자본의 해외유출이 손쉬워지면서 여차하면 국내외 자본이 동시에 빠져나가는 '물꼬'도 트여 있다.

경제현장의 시그널은 도처에서 적색경보다. 이것이 5월위기로 폭발할지 여부는 세 가지 불안요소에 달려 있다. 5월로 예정된 SK글로벌 분식회계의 실사결과 발표가 그 첫째다. 분식의 결과가 한국기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무디스와 S&P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여부가 그 둘째다. 무디스는 한.미간 대북 공조가 안될 때는 신용등급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벌써부터 으름장이고, 유럽상공인들마저 한.미공조가 한국 투자에 최대기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민감한 '뇌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방문 성과 여부다. 북핵 공조와 이를 통한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에 대한 믿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새 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안도 해소해야 한다.

민족의 논리에 집착해 외교적 위기를 자초하는 '오기'는 접어야 한다. 특히 미군 제2사단의 한강이남 배치가 동맹관계의 변질 내지 격하로 대외적으로 인식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러잖아도 경제주체들의 위기대응체제가 약화돼 위기가 올 경우 조기극복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분식회계와 가계부채라는 새 악재에다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도 불안이 적지않다. 노사갈등과 이념.계층.세대간 대립구도 때문에 '금 모으기'와 같은 국민적 에너지의 결집도 의문시된다.

한.미관계가 껄끄러우면 위기극복에 미국의 협조를 얻기가 어렵고 취약해진 국가재정에다 국민적 거부감 때문에 공적자금의 추가투입도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부처간 또는 정부.여당간에 정책이 따로 놀아 경제부총리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시장에 대한 당국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

위기가 오지 않도록 뇌관을 사전 차단하는 일이 다른 어떤 개혁보다 급하고 이 모두는 대통령의 미국방문 결과로 귀결된다. 경제와 외교안보 불안이 한데 뭉뚱그려진 위기는 곧 국가 리더십의 위기다. '언론과의 전쟁'에 한눈 팔 때가 아니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