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자원」위에 세운 일등국|시계와 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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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라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유일한 한국식당 고려정주인 금씨는 중국계종업원 아가씨에게 월봉50만원을 주면서도 딴 직장으로 옮길까봐 걱정이었다.
대사관 간부직원 방씨는 자기집 담당청소부 아줌마의 월수입이 자기봉급보다 적지않다고 설명해준다.
백조가 메를 짓는「래만」호수를 두고서「샤셰」라는 안내원 아가씨는 『공해때문에 큰일』 이라고 개탄했지만 맑고 푸르러보이기만 했다.
아뭏든 GNP숫자의 허의성이 아무리 비판받는다 해도 그 숫자로도 1등인 「스위스」의 경우에는 진짜 1등 국가인성 싶었다.
「스위스」인을 일컬어 『「유럽」의 유대인』이라고 한다. 거친 박토에다 알량한 우리나라의 땅속을 부러워할 정도로 전무한 지하자원속에서 그들이 지닌 유일한 자산은 「사람」뿐이었다.
「스위스」인들은 그「사람」하나로 18세기말까지만 해도「유럽」의 가장 가난뱅이 나라였던「스위스」를 오늘의 부국으로 끌어올린 조상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무수한 희생과 노력의 대가입니다.』제분기계 「메이커」의 효시인「뷜러·브러더즈」사의 부사장 「윌러」씨는 3명의 직공으로써 창업해 고조할아버지때부터의 고생내력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결코 신화가 아님을 강조했다.
사가들은 「스위스」경제의 초기단계를 「피의 수출」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한다.
가난했던 「스위스」인들은 이웃 강대국들의 전쟁때마다 단골 용병으로 팔려나가 생계수단으로 삼았고, 그 숫자는 한때 전인구의 20%에까지 이르렀었다.
한 목사는 이를 두고 『「스위스」용병이 흘린 피는 「바젤」에서 「파리」까지 운하를 끌어 이를 가득 채울 만 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바티칸」교황청의 근위병은 반드시 「스위스」인만을 채용하고 있는데서도 「피의 수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족한 자원과 내수시장의 협소로 어차피 수출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던 「스위스」는 영국에서 방직기계 제작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워오면서 본격적인 공업의 기초를 마련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각 국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수출시장개척의 선봉장역할을 해냈다.
세계시장의 70%를 점하고 있는 「시계의 나라」답게 거리의 웬만한 건물 정면에는 대형시계가 걸려 있지만『저 시계가 정확한 것이냐』는 물음은 「스위스」인들이 가장 부쾌해 하는 질문이다.
자기네들의 기술과 신용을 의심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라도」시계공장을 방문했을 매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기술자들이 연로함에 놀라자 안내직원은 평균연령이 40세가 넘는다고 설명하면서 그만큼 숙련공임을 덧붙여 강조했다.
『우리의 기술수준이 세계최고임을 자부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난센스」입니다. 능력에 적합한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해서 품질로 경쟁하는 것만이 소국의 살길이죠』-.
경제성의 한국담당 「막스·크렐」씨는 입장이 비슷한 한국도 「스위스」형 산업개발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최신형 고성능「레이다」까지 만들어내는 정밀기술을 지녔으면서도 왜 자동차공업에는 손대지 앉느냐는 물음에 그는『대국들의 자동차와 경쟁이 되겠느냐』고 간단히 반문했다. 그는「스위슨가 소국임을 재삼강조하면서 비록 자동차수요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대신 이웃 서독과 미국 등에 수십까지의 주요 부속품과 기술특허를 수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수지계산은 얄미울 점도로 치밀하다. 교과서적인 비교우위론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고도로 발달한 문인주의에 입각한 「나의 이익」에서부터, 철저히 따져 나간다.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되는 모든 사항은 일체가 국민투표에 붙여지고 그 횟수가 1년 평균10번이나 된다지만 혼란의 우려보다 오히려 직접직인 정치참여를 통해 스스로의 권익을 챙기는 최고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조상들의 뼈저린 선험으로부터 무한한 실리추구를 배웠으며 치밀한 손익분기점만이 행동매사의 준칙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그들의 인상은 최근 자진해서 7천만 「달러」상당의 차관제공을 제의해 올 정도로 좋은 편이다.
『인구 3천6백만명이나 되는 한국시장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한 기업가는 『한국에 대한 수출도 중요하지만 한국을 통한 수출에 더 관심이 크다』고 대답했다. 그는 중공을 포함한 동남아시장을 겨냥해 자기들이 기술과 자본을 대고 한국사람 손으로 물건을 만들면 좋은「파트너」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다분히 일본과의 경쟁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베른」의 한「호텔·매니저」가 나의 국적을 확인하면서 「노드코리아」를 욕하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몇해전에「스위스」은행에서 몇백만「달러」를 빌어다가 떼어먹었다는 것이다.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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