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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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프랑스」전국민은 8일 모두 깊은 슬픔속에 잠겼다.『「이븐」아줌마』로 불려졌던「드골」미망인이 이날 새벽 운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적「퍼스트·레이디」의 상징이었고「프랑스」여성의 대명사처럼 돼있었던「이본」여사가 전 국민을 울린 이유는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고생때문일 것이다.
58년부터 69년까지「퍼스트·레이디」였던 그녀가 고생이 막심했다면 우리네사고방식으로는 선뜻 납득할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1919년「파리」의「살롱·도톤」(Salon D'automne·미술전람회) 에서「드골」대위를 만나 너무나 정열적으로「제스처」를 쓴 끝에「드골」이「이본」의 옷에 찻잔을 넘어뜨린 인연으로 21년 결혼했다.
군대생활의 고난속에 3자녀를 낳은「이본」은 34년 남편과 헤어져「부르타뉴」지방에서 고독하지만 자녀교육에 열중했다. 그만큼「드골」의 군무에서 가정적인문제를 배제해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히틀러」의「프랑스」점령으로 40년6월「런던」으로 도망가는 마지막 피난선을 타지 않았던들「이본」은 더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바로 이 피난선속에서「이본」은 극적으로「드골」을 만났던 것이다.
「런던」과「알제리」에서의 망명생활은 결코 행복했던 것이 아니었으며「프랑스」해방후「드골」이 대통령이 됐어도 행북은 여전히 멀었다.
식민지였던「알제리」독립문제로 고심하던「드골」이 수차례 암살을 모면했던 것 못지않게「이본」도 여러차례의 총탄세례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본」은「드골」을 그림자처럼 동반하면서도 결코 표면에나서「퍼스트·레이디」라는 직분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권력을 이용하지도 않았다.「이본」은 항상 조용한 아내였고 인자한 어머니였다.「이본」은「드골」뿐아니라「프랑스」인들에케 마음 편한 평화지대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이본」이 가졌던 단 한가지 불평은『장군은 휴식할 권리를 얻을수 없나요』라고 각료들에개 실토한 것뿐으로 전해진다. <주섭일「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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