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70년대|최인호<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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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7년에「데뷔」했던 나는 어엿한 작가였지만 70년대 들어서서도 어느 잡지사에서건 청탁한번 받지못한 불쌍한 문학지망생이었다. 틈틈이 써둔 단편소설 20여편을 발표할 지면이 없어 우울해있던 나는 70년3월 제대하자마자 현대문학사를 찾아가 무조건 실어달라고 떼를쓴 끝에 『술꾼』이란 작품을 발표할수 있었다.
나는 이작품이 문단을 깜짝 놀라게해 줄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기대했던것만큼 큰 성과는 얻지못한대로 쓸만한 작가가 출현했다는 평가는 받을수있었다.
나의 70년대는 그렇게 시작했다. 71년 나는 닥치는대로 글을 발표하는 무서운 신인작가였다.
71년의 활약으로 72년도에 나는 현대문학상을 받았는데 수상소감에 나는 이런내용의 건방진소리를 했었다.
묵은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그동안 내가 습작한 원고뭉치가 내키를 넘는것을 발견했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 기초가 약한 작가는 아닐겁니다….
72년도 여름무렵 조선일보에서 소설을 써보라는 청탁을받았다.
그해 신춘문예심사위원이던 황순원·박영준 두 은사의 추천이었는데 찾아간 내 젊은 몰골이 못내 못미더워서였는지 편집국장으로부터 미리 줄거리를 써와보라는 수모를 받았었다.
이래서 나는 73년 가을까지『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이작품 연재중에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신문 사설에 『별들의 고향』이 독자들간에 많이 읽히고 있다는것은 우리나라 독서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탓이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
나는 감격하면서 그 사설을 읽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찬사가 언젠가는 곱배기 비난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었다. 74년에 나는 생전처음 세계일주를 했으며 『별들의 고향』은 불티나게 팔려 그당시 허허 벌판이던 영동에 내땅을 사서 내가 설계한 집을 지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5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어느신문 문학난에 『무서운 젊은이들의 우상』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난뒤부터 나는 소위 청년문학의 논란에 휩쓸려 곳곳에서 두둘겨맞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화 되기시작했다.
나는 통「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등 퇴폐적인「그룹」의 기수가 되었으며 항간에는 내가 대마초를 즐겨피운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조금씩 「인기작가」라는 생소한 관사가 내이름앞에 붙기 시작했다.
청년문학논쟁은 75년도까지 연장되더니 76년도에는「노이로제」증상이 겹쳐 신문이나 잡지에서 나에대한 비난기사가 나오면 빌기발기 찢어버리는 신경질적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소위「70년대작가」들이 찬란하게 등단해서 같이 얻어맞기 시작했으므로 조금 마음 편하긴 했다.
그런데 이무렵「상업주의」라는 장으로 변명할 여지없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잔재가 남아있는 「상업주의」란 신조어는 신문과 잡지들이 거의 매일, 혹은 매달 거론하여 비분강개하기 시작했으므로 70년대작가들은 돈이라면 환장하는 매춘부적 자괴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쩌면 정치체제에 대한 울분이 70년대 작가들에게 온통 집중되었는지도 모르나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70년대말부터는 소위 가난한자, 억눌린자, 박해 받는자들에대한 애정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게되었다.
70년대의 나의 회고는 별수없이 여기에서 끝이날 수 밖에 없지만 돌이켜 보건대 지난10년동안 개인적으로 나는 22권의 책을 가지게 되었으며 예술인들에 대한 자세를 논의할때 나는 의례 치부한 작가가 되어 마땅히 세금을 내야한다는 평가를 받아 어느날 세무서에서 내 재산상태를 알아보기위해 암행어사 출또까지 받은 몸이되었다. 이제 70년대도 저물어간다.
바라건대 29세 노처녀의 나이처럼 79년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어김없이 80년대가 다가와 어제의 만세고, 어제의 말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작가와 새로운 조어들이 80년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럴때 우리들은 이미 「바통」을 넘긴 주자들처럼 헐떡이며 「트랙」을 달려가는 후배들을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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