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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667>제66화 화교(42)|진아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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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사원과 함께 일제시대부터 유명했던 중화요릿집이 서올 관수동의 대관원이다, 대관원은 19l0년대 말께 산동인 왕씨란 사람이 창업했다. 음식 맛이 뛰어나 아사원과 쌍벽이었지만 고객은 주로 서민층이어서 정치인·재계인사 모는 고급관리들이 많이 드나들던 아사원과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
창업이후 주인은 몇 번 바뀌었으나 한 자리에서 60여년을 계속 영업해오다 지난77년 도시계획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헐려 문을 닫고 말았다. 마지막주인은 우연히도 창업주와 성이 같은 왕서무씨(현 화교협회장)였다.
시청 앞 아사원 부근에 있던 대려도는 아사원 종업원 출신인 산동인 모옥당씨가 주동이 돼 합자회사 형식으로 l953년에 창립했다. 자리는 원래 봉래각이란 중국집터였다.
역사는 짧았지만 위치가 좋았는데다 대표 모씨의 장사수완이 뛰어나 곧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7년 후인 l960년 모씨는 부인과 함께 연탄「가스」에 중독돼 횡사하고 말았다. 모씨부부가 죽자 당시 대만에서 공부하던 장남 모종희씨가 급히 돌아와 경영권을 이어받게 됐다.
그러나 이후 영업이 부진하고 출자자간에 의견대립이 생겨 모종희씨는 대려도란 상호를 지니고 따로나와 서울 관철동 삼일로「빌딩」뒤에 새로 음식점을 차렸다. 이 제2대려도는 6년쯤 전 삼일로「빌딩」때문에 벽에 금이 가고 그의 말썽도 생겨 폐업해 버렸고 모종희씨는 그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원래의 대려도는 모씨가 떨어져 나간 뒤 금문도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계속했으나 수년 전 역시 폐업하고 지금은 건물까지 헐려 공터로 남아있다.
대관원, 대려도 외에 대지 5백여 평으로 최대를 자랑하던 봉화관도 77년 영업부진으로 폐업하고 말았다. 창업주는 진경선씨, 마지막주인은 그의 아들 진학초씨(한국에 귀화)였다.
비교적 유명했던 큰 중국집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서울 을지노3가의 안동장과 명동의 동해루 정도인 것 같다.
50여년 전에 창업된 안동장은 창업자 왕숭요씨가 아직도 아들 용성과 함께 경영일선에서 뛰고있다. 명동의 동해루(주인 강자신)는 창업 후 주인이 몇 번 바뀌었지만 상호·위치·건물 등은 50여 년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이들처럼 널리 알려지진 못했지만 오랜 역사속에 그 나름대로 독특한 전통을 가진 집으로 서울 명륜동의 진아춘이 있다.
진아춘하면 아마 고개를 끄떡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 쪽, 의대정문옆쪽에 있는 이 집은 반세기가 넘도록 경성제대와 서울대학생들의 단골 자장면 집이 있기 때문이다.
진아춘은 54년 전인 1925년 명륜동4가88번지 지금의 위치에 개업했다. 창업주는 산동성 봉래현 출신인 이진재써(작년에 별세). 현재는 양아들인 송협국씨가 맡고 있다. 송씨는 나와도 절친한 사이다.
이씨와 송씨는 항상 『진아춘은 박사와 학자손님이 가장 많은 중국음식점』이라고 자장하곤 했다. 서울문리대와 의대, 법대생치고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일제 경성제대생 시절부터 최근까지 진아춘을 모르면 「가짜학생」이라고 했으며 문리대생 간에는 한때 『진아춘 간다』라는 노래까지 유행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단골이 많았다. 서울대가 옮겨가기 전 이희승 박사나 고병익 박사(서울대총장)등 문리대교수는 거의 단골이었고, 의대교수와 학생들은 아직도 마치 구내식당처럼 이곳을 애용하고 있다.
반세기동안 진아춘은 서울대학의 산역사를 목격해왔다. 정국이 거칠었던 한때는 「데모」학생들이 쫓기다 뛰어들기도 했고, 해마다 졸업생과 신입생들의 축하「파티」장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학생·교수들과는 한 가족처럼 됐다.
요즘도 가끔 이전된 관악「캠퍼스」에서 옛 맛을 못 잊어 찾아오는 「올드·팬」들이 많다.
때로는 서울대문리대출신의 장관이나 국회의원들이 지나다 들러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가는 수도 있다. 주인 송씨는 이럴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학생과 학자들만 상대해서인지 송씨는 나름대로 뜻 있는 사회활동도 펴고있다.
화교들의 모임인 인의복리회 회장을 맡아 양로원과 일선장병을 위문하고 불우이웃 돕기에도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왔다.
반세기의 체험을 통해 본 서울대 학생들에 대해 이씨와 송씨는 늘 이렇게 말해봤다.
『한번도 외상값 떼어먹거나 불쾌하게 구는 일이 없어 세계제일』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칭찬의 말이 아니라, 반세기동안 이루어진 상호 이해와 우애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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