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 74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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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전쟁과 재해를 많이 겪는 나라의 사람들일수록 적십자「마크」에 친숙감을 느낀다. 물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적십자 깃발은 「스위스」 국기의 색깔만 바꾸어 놓은 도안 그대로이다. 창안자 「앙리·뒤낭」의 국적이 「스위스」인 때문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그 바탕과 색깔은 같지만 「십자」 대신 다른 「심벌」을 새겨 놓기도 했다. 회수국들은 초숭달, 「이란」은 「라이언」과 태양-.
아뭏든 적십자의 깃발은 전쟁과 재난이 있는 곳엔 어디에서나 나부끼고 있다. 세계적으로 그 회원은 무려 2억 5천만명을 헤아리며, 가입국만해도 1백 26개에 달한다.
우리 나라 적십자는 74년 전인 1905년 10월 27일 창립되었다. 고종황제는 「광제박애」하는 만국적십자운동의 뜻을 받아들여 그보다 2년 전에 『육군의 부상자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가입하게 했었다. 이것은 최초의 적십자 조약이었다. 대한 제국 칙령으로 「대한 제국 적십자사」가 발촉되고 나서도 정작 그 기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적십자라 명침함은 당초 서서국 경도령양 「나이징게루」씨가 서력 1850년부터 각 병원에서 중환으로 규고하는 자를 위하여 협야로 열심 간호하여 감복한 경험에 의하여-.』
1906년 2월 12일자 황성신문에 소개된 「대한국 적십자사 공포 취지문」의 서두이다. 창립자를 「앙리·뒤낭」 아닌 「나이팅게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일제때는 그나마 깃발을 내려야 했으며, 오히려 상해 임정시절에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했었다. 독립군의 의료기관으로, 혹은 구호사업 기구로서 활동한 것이다. 한편 이 망명지에서의 우리 적십자활동은 일제의 한국인 학살행위를 전세계에 호소하는 일까지 했었다. 그러나 독립국의 회원으로 승인 받지 못한 것은 한스러운 일이었다.
6·25동난중엔 삼전국들의 적십자활동은 많은 감동을 자아냈다. 「스웨덴」적십자의 야전병원, 「덴마크」의 병원선, 서독의 적십자 병원 등은 전란의 고통속에서 우리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70년대의 우리 적십자사는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으게 했다. 남북 적십자회담은 잠시나마 전쟁의 상혼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희망의 불꽃은 북 측의 냉담으로 꺼져가고 있다. 어두운 이념의 그림자에 인도주의조차 빛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는 않다. 희망은 결국 인도주의 쪽에 있게 마련이다. 대한 적십자사의 창업 74주년을 맞는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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