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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반쪽짜리 예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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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지금 대한민국은 심각한 울증이다. 의욕을 상실한 채 무력감이나 고립감, 자살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을 울증이라고 한다는데,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압도적인 1위라니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세월호 이후에 울증은 더욱 깊어졌으리라. 혹시나 기대했던 월드컵은 실망을 넘어서 절망이다. 경제도 문제란다.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활력을 잃어간다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결방되었던 드라마와 예능들이 돌아왔고, 각종 축제와 이벤트들도 재개되었다. 그동안 활동을 못해 속 태웠을 예능인들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귀한 재주가 또다시 웃기는 일에만 쓰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드는 것은 몰라도 나간 자리가 크다고 했던가. 결방을 통해 비로소 우리 주위에 그렇게 많은 오락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여행은 물론 육아, 군대, 취업 얘기까지 모두 예능으로 말하는 세상이다. 예능이라고 다 오락은 아닐 터인데. 우울할수록 웃음이 필요하다지만, 자극적인 연애와 오락의 대증요법으로 울증을 치료하는 것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조증은 울증의 또 다른 얼굴일 수도 있으니까.

 세월호 앞에서 무능했던 것은 정부만이 아니다. 예능 역시 무력했기는 마찬가지다. 애도를 위해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것이야말로 예능의 역할을 포기한 것 아닐까. 예능이 반드시 웃자고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슬플 때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는 것도 예능의 역할이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승선자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구조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니까. 또 기존 예능들이 슬픔과는 너무 거리가 먼 오락적인 내용 일색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에 대한 기원과 희생자에 대한 위로를 공유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예능인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능인들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 사회가 예능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시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한 사회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도록 하고 기쁨은 고취하며 슬픔을 승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축제에도 예술이 필요하지만 추모와 기원에도 예술이 필요하다. 아니 후자의 경우가 더욱 절실하다. 슬픔에 대한 공감과 위로, 기원에는 합리적 이성보다 본원적인 감성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솔베이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노래야말로 슬픔을 가장 절절하게 전달하는 음악적 도구다. ‘입다의 애가’는 자식의 죽음 앞에 절규하는 이스라엘 전사의 통곡이요 애탄이다. 전통장례의 상여소리는 유족들의 슬픔을 마을 전체가 공유하고 동참하는 애절한 울림통이었다. 악기를 통해서도 비감과 위로는 전해진다. ‘비창’이 그렇다.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분향소를 찾았다고 한다. 꽃을 놓고 침묵으로 기도한 것 외에는 달리 해줄 것이 없어서 안타까웠을 것이다. 이들의 절절한 위로와 기원을 하나로 표출하고 묶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9·11테러 10주년 추모식에서 노년의 폴 사이먼이 노래한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절절한 공감과 위로를 만들어냈다.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이 비운의 다이애나비를 얼마나 아름답게 추억하게 해주었는지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굳이 대단한 예능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슬픔과 위로, 공감과 의지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시와 노래, 춤이 필요할 뿐.

 울증은 심각한데 치료할 예능은 빈약하기만 하다. 예술적 상상력이 부족하고 시대감각도 떨어진다. 여느 대중 집회와 차별되는 내용도 거의 없다. 그동안 모든 예능의 끼와 예술적 역량을 웃기는 데만 쏟았던 까닭이다. 이제는 울고 슬퍼하는 일에도 예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아파서 청춘이라고 했던가. 지금 우리 사회는 아파서 예술이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약력 : 서울대 작곡과 이론전공 졸업. 프랑스 소르본대 박사. (사)음악사연구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