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중·러 가스관 중국 독점 원치 않아 … 한국, 실리 챙길 타이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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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원유를 앞세워 아시아 에너지 시장 진출에 속도를 높이는 러시아를 어떻게 q볼 것인가. 중국 산둥까지 들어오는 러시아 가스 파이프라인은 동북아 에너지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지난달 30일 이틀간 일정으로 막을 올린 ‘제5회 아·태 에너지 서밋(PES)’ 7개 세션 가운데 전 세계 200여 명의 에너지 전문가들이 특히 주목한 행사는 둘째 날 첫 순서였던 한·중·일·러 전문가 토론회였다. 이 세션은 주제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베팅:적중할 것인가?(Russia’s Asia bet:Will it pay off?)’였다.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 류지철 박사, 쑤칭후아 중국 인민대 국제에너지환경전략연구소 센터장, 일본 석유회사 데이코쿠의 아사쿠라 겐조 회장, 러시아에너지연구원(ERI RAS) 타티아나 미트로바 석유·가스부문장이 참석해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사회는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백근욱 선임연구위원이 맡았다. 다음은 토론회 주요 발표 내용과 세션이 끝난 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추가 설명이다. 토론회는 외부 비공개를 전제로 진행됐으나 회의 주최 측과 발표자의 동의를 얻어 공개하기로 했다.

▶미트로바=중·러 간에 지난해엔 원유, 올해엔 가스 공급 계약이 체결됐다.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고 2030년까지 20년 이상을 내다보고 차근차근 준비한 결과다. 정치적·즉흥적 결정이 아니고 국가적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준비해 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격발장치’는 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중국과의 딜은 양측에 모두 이익이 된다. 중요한 건 거래 이후다. 인프라가 구축되면 많은 다른 딜이 추가로 이어질 것이다. 가스파이프라인은 그 자체로서 인프라다. 러시아로서는 오랫동안 꿈꿔온 극동지역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과 러시아 간에 파이프라인 연결 논의가 있었지만 사실 북한 경유 카드는 정치적 쇼였을 뿐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의 연결은 이제 현실이 됐다. 일본과 한국으로도 연장할 수 있는 인프라가 된다. 산둥으로 온 파이프라인을 한국으로 확장하는 데 대해 한국 측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면 러시아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대단히 환영할 일이지만 그 일은 전적으로 중국에 달려 있다.

▶쑤칭후아=21세기 동서 냉전은 에너지 냉전이다. 비교적 싼값에 가스 도입 계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이 혜택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러시아를 도와준 것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떠안았기 때문이다. 이번 가스 딜은 단순한 에너지 협력이 아니라 양국 간 전략적 협력의 계기가 됐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2주 전에 리커창 총리가 영국을 방문해 LNG 계약서에 사인한 장면도 눈여겨봐야 한다. 중국 에너지 외교는 철저히 실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얘기다. 중국의 원유 수입은 중동·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러시아였는데 순서가 역전됐다. 러시아가 4등에서 3등이 됐다. 러시아 외에도 중국이 수입할 곳은 많다는 얘기다. 한국과의 서해 라인 연결은 타이완 사례를 참조할 만하다. 수뇌부 간의 결정이 중요하다. 특히 에너지 거래는 결정이 중요하지 통과료(파이프라인 경유를 의미) 등 세부적인 협상 사안은 절차일 뿐이다. 중국은 조만간 국내 모든 파이프라인을 총괄하는 회사를 새로 만들 계획이다.

▶아사쿠라=동해(그는 ‘일본해’라고 표현)를 분쟁의 바다가 아닌 평화와 번영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일본의 대양세력과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이 부딪히는 지점이 동해라는 인식은 구시대적이다. 기술 혁신에 따라 지정학적 관점도 수정할 때가 된 것이다. 기술 발전으로 해저 3500m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동해의 가장 깊은 지점이 바로 이 정도 깊이다. 동해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와 니가타현을 잇는 천연가스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중간쯤에서 한국의 울산이나 포항으로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LNG(액화석유가스)와 PNG(파이프라인 전송 가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배로 들여오는 LNG가 지점간(point-to-point) 거래라면, PNG는 지점과 구역(point-to-zone) 간 거래다. LNG는 대양세력이, PNG는 대륙세력이 이용하는 수출 방식인 셈이다. 동해 파이프라인 건설은 일본과 한국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모두 이용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서해라인을 건설해 대륙과 가스파이프라인을 연결한다면 일본 입장에서도(일본으로 연결할 수 있으니) 환영할 일이다.

▶류=세계 에너지 질서가 동북아 시장에서 급변하고 있다. 에너지 문제도 다자간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장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다자간 협정이어야 한다. 러시아만 상대하거나 중국만 상대하는 방식은 이제 맞지 않는 시대가 됐다. 한반도 신뢰 구축,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북핵 해결 등 모두 다자가 함께 뛰어들고 머리를 맞대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다. 한국에는 지금 에너지라는 중요한 문제가 정책의 사각지대로 들어가 버렸다. 가스협력은 MB정부 때 얘기됐는데 지난해 한·러 정상회담 때 의제에서 제외됐다. TSR(시베리아횡단철도)과 TKR(한반도종단철도)만 포함됐다. 에너지 확보같이 중요한 일은 정권 차원을 넘어 일관성을 갖고 장기적 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정권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적 의제이기 때문이다. PNG도 구상 초기에는 북한 경유가 중요 이슈였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 경유 노선은 어렵다. 대안을 생각할 때가 됐다. 중국과 파이프라인을 연결하기로 한 러시아는 중국이 유일한 수요 독점자가 되는 상황이 반갑지 않다. 중국은 중국대로 구매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이나 일본의 참여를 원한다. 한국도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된 셈이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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