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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스타도 퍼가는 된장, 2011년산이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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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정연태 죽장연 대표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상사리에 위치한 전통 장류 보관 장독대에서 올해 판매를 시작한 2012년산 된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장류도 와인처럼 생산 연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빈티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4일 서경주역에서 차를 몰아 1시간 30분쯤 달리자니 죽장(竹長)이라는 지명을 알리는 간판들이 나타났다. 고도 450m의 산간마을인 이곳 죽장면은 고려 건국 초기에 고려인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신라 귀족들이 들어와 연락을 끊고 대나무처럼 꿋꿋이 살았다고 해서 이 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전쟁이 일어났지 모를 정도로 평온한 곳이었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바깥 세상과는 연이 먼듯한 이 마을이 최근 부각되고 있다. 전통 된장·고추장·간장 등 장류를 만들어파는 ‘죽장연(竹長然)’때문이다. 마을 이름과 ‘자연(自然)’을 결합해 만든 시설이다.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0년 당시 오리온 계열사 롸이즈온 마케팅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던 정연태(49) 대표가 죽장면 상사리 골짜기 66만1157㎡(20만평) 터에 전통장 생산 장원(醬園)을 만들었다.

 마을과의 인연은 부친 정봉화(75) 영일기업 회장에게서 비롯됐다. 포스코 포항사업장 내의 운송을 전담해온 정 회장은 1999년 상사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포항시에서 가장 오지마을을 찾아 제대로 된 봉사를 하자”는 의지가 담겼었다. 영일기업 직원들은 농기계를 무상수리해주고 특산물인 콩과 사과 수확기에는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면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나는 콩으로 매년 장을 담가 영일기업 직원들이 먹을 1년치 물량을 선물로 보내줬다. 10여년 전부터는 아예 장류를 주민들과 직원들이 함께 담그는 행사도 하고, 이를 나눠 먹었다.

 정 대표는 이곳에서 기회를 봤다. 미국 남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기도 한 그는 “가장 한국적인 맛으로 세계 음식시장에 도전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곧 터를 마련한 뒤 제조를 전통방식에 근거하되 설비는 현대식으로 갖췄다. 장류 생산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콩을 삶기 위해 16개의 커다란 가마솥(70kg들이)을 설치했다. 11월 콩 수확기가 되면 그 때부터 메주 만드는 일이 시작된다. 최신 설비를 이용해 콩을 세척하고, 땔감은 반드시 참나무 장작을 이용한다. “2시간 정도 삶고 6시간 뜸 들이는데, 경험이 많은 마을 주민 5명이 담당합니다. ” 메주모양을 기계가 만들어 내놓으면 마을주민들이 모여들어 유기농 재배에서 나온 볏짚으로 메주를 엮은 뒤 50일 정도 발효시킨다. 온도와 습도 유지는 자동조절 기능이 있는 기계에 맡긴다. 발효실에서 하얀 곰팡이가 필 무렵이면 소금물과 함께 장독에 들어가 6개월 이상 숙성된다. 소금은 전남 신안 태평염전에서 생산되는 2년 된 천일염만을 쓴다. 전 제조공정은 마을 주민들의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콩이 수확될 때부터 장독에 메주가 들어가는 3월 말까지는 주민 40여명이 죽장연에서 일한다. 정 대표는 “콩은 시중 가격보다 kg당 500원을 더 쳐주고,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 주민들이 돈벌이를 할 수 있어 모두들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죽장연에서 만들어진 고추장·된장·간장(왼쪽부터 시계방향).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정 대표는 제조시설보다 높은 지대여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조성된 장독대 무리가 놓인 곳으로 안내했다. 총 3곳으로 나뉘어진 장독대에는 3000여개의 장독들이 열과 행을 맞춰 진열돼 있었다. 장독은 무형문화재 이무남(75) 장인이 생산한 제품 등 ‘숨을 잘 쉬는’ 것들만 사용한다고 했다. “2010년부터 제조한 된장 등 장류를 생산 연도별로 표기해 분리해뒀습니다.” 정 대표는 이를 ‘장류의 빈티지(vintage·생산연도)화’라고 불렀다. “와인이 빈티지마다 다른 특성을 보이듯 장류 역시 제조한 해의 기후에 따라 맛이 달라지죠. 각 해의 기후 특징 등을 따로 기록해 놓고 있죠.” 올해부터는 2012년산 된장을 시장에 내놨는데, 2011년 산이 조금 더 비싸다고 한다. “현재는 판매용기에 생산 시기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 해의 날씨 특징도 알릴 생각입니다.”

 제2장독대의 한 켠이 눈길을 끌었다. 장독마다 사람 이름이 씌여 있었다. 150개 정도 돼 보였다. “장독 주인들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분들이 직접 장류를 골라 자신 소유로 만든 것이죠.” 죽장연에서 만든 장류를 보관까지 맡기면서 필요할 때마다 연락해 배달시켜 먹는다는 것이다.

 이들 중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후니 킴(김훈이·42)’. 2011년 10월 발매된 『2012년판 미슐랭가이드-뉴욕편』에 ‘1스타 레스토랑’으로 이름을 올려 ‘한국 최초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오너셰프’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뉴욕 헬스키친 거리에 ‘DANJI(단지)’라는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 메뉴는 ‘Dwenjang jjigae(된장 찌개)’. 다른 거의 모든 한식에도 된장을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죽장연에서 가져다 쓰는 된장이다. 메뉴에 아예 ‘죽장연 된장으로 만든 된장찌개’라고 표기돼 있다. 정 대표는 “매달 150∼200kg의 장류를 보내고 있다”며 “김셰프는 고유의 된장이나 간장 향가지 그대로 살려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김셰프가 만든 또다른 한식레스토랑 ‘HANJAN(한잔)’ 역시 죽장연 장류를 사용한다. 이 식당은 뉴욕타임스 ‘2013년 뉴욕 10대 레스토랑’으로 선정됐다. 김셰프는 2012년과 지난해 죽장연을 직접 찾기도 했다. 자신이 쓰는 음식 재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셰프는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에게 된장 냄새를 먼저 설명한다”며 “전통된장의 냄새를 외국인들이 싫어한다는 생각에 인위적으로 없애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식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니 만족도가 높다”고 소개했다.

 정 대표는 김셰프의 식당처럼 전세계에 오픈한 한식 식당들과 교류를 넓히고 있다. 직접 e메일로 죽장연 제품을 알리고 현지 방문도 하면서 마케팅을 진행 중이다. 현재 미국 말고도 일본의 ‘처가방’, 홍콩의 ‘명가’ 등에서 죽장연 제품을 쓰고 있다. 이 덕에 1년 매출 24억여원 중 15억원이 수출에서 이뤄진다. 정 대표는 “아예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생각했다”며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국내에서도 자연스레 그 인지도가 높아질 것으로 봤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서울 청담동 퓨전레스토랑 ‘밍글스’등 음식점은 물론 현대백화점·롯데백화점 등에 입점해 있다.

 정 대표는 생산규모의 확대보다는 프리미엄화에 신경을 더 쓸 계획이다. “전통장을 고급화하고 세계화하겠다는 꿈을 위해선 현재의 규모에서 최상의 제조와 보관 상태를 만들어내는 게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된장을 ‘1000일 식품’이라고 불렀다. “콩을 밭에 심으면서 시중에 내놓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1000일입니다. 이 기간 내내 ‘정성’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명품이 나오는거죠.”

포항=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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