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제65화 불교 근세 백년 (41)|고불회|강석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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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종욱 스님이 친일로 선회하고 월정사 주지가 되어 교단의 실력자로 부상했을 무렵 선학원은 이미 각 사찰의 출연으로 재단 법인 조선 불교 선리 참구원을 만들어 인가 (1934년) 를 받았기 때문에 총본산의 지휘 감독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때 유교 법회가 열렸고 선학원에 모이는 선객들은 항상 총본산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므로 총본산 측에서는 선학원을 없애려고 했다.
그 주동 인물이 이종욱 스님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친일로의 전향까지 가세되어 스님에 대한 비난은 자자했다. 그러나 이종욱 스님이 독립 운동을 은폐하기 위해서 친일을 위장한 사실이 8·15광복 후에 밝혀져 스님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고 지금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종욱 스님은 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임정과 연락을 갖고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아 밀송하고, 국내의 동지들과 회동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3월에는 강태동 유석현 이응진 김현국씨 등과 함께 군사 봉기를 계획했다.
그때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자금 조달의 책임을 스님이 맡고 유석현씨는 무기 구입의 책임을 맡았었다. 그리고 l945년9월18일을 거사 일로 잡았다. 이 일자는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이 본토에 상륙하기로 한 시기와 일치한다. 계획을 세운 스님은 곧 월정사와 묘향사 석왕사 등을 돌면서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김재호 김시현 김찬 등 동지들을 중국 국민 정부와 우리 광복군에 밀파하여 무기 반입을 교섭하도록 했다.
이 계획은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함으로써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으나 우리 독립 운동사에 남을 큰 모의였다. 이러한 사실은 광복 후 임정 요인이 돌아옴으로써 밝혀졌지만, 나는 일찌기 선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어린 시절부터 임정에 몸을 담아온 유석현씨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범어사 노전을 말았던 소임을 내놓고 선학원에 돌아와 원주 일을 맡고 있었다.
광복이 되자 사회 각계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온갖 단체가 생겼는데 불교계도 다를 바 없었다. 불청동맹 불교혁신 연맹 등 6개 단체가 있었다. 이 가운데 불교 혁신 연맹은 백석기 (당시 서울시 사회국장·납북) 유성갑 (전 제헌 의원) 등이 주동이었는데 불교 총본원산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선학원을 근거로 총무원과 대립해 있었다. 대체로 이때 불교계 분위기는 왜정 때 총무원 일을 보던 스님들을 일괄해서 친일파로 몰아 사표를 내게 했다. 이종욱 스님이 1945년 겨울 총무원장직을 내놓자 총무원장에 김법린 스님이 추대되고 최범술 유섭 스님 등이 간부로 활약했다.
총무원의 진용이 바뀌었어도 선학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김용담 장상봉 이부열 곽서순 스님 등은 계속해서 총무원과 맞섰다. 이들은 각 단체나 파벌의 실력자였으며 남북 협상을 지지하는 좌경 인물들이었다.
장상봉 곽서순 같은 스님들은 이북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불교를 혁신하여 힘을 모아 조국 건설에 일조를 해야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좌경의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차차 색채를 농후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김용담 스님이 선학원의 부이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선학원이 공산주의자들의 소굴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선학원과 총무원이 맞선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김법린 총무원장이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을 만나 일본 사찰을 중단에서 인수하기로 협의가 되어, 그중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본원사를 선학원에 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뒤에 학교를 한다는 이유로 총무원에서 주지 않자 선학원으로서는 실망이 매우 컸었다.
선학원말고도 당시 총무원에 맞서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송만암 스님이 이끄는 고불회였다. 혁신한다 하면서 새로운 것만을 쫓다가 불교가 변질돼 가는 것을 보고 과거의 엄격하던 계율과 법식을 되찾아 불교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모인 고불회는 태고사 (현 조계사)에서 고불회 대회를 갖고 고불회의 취지를 선포하여 한때 교계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송만암 스님은 계·정·혜 3학이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청정하고 돈독했기 때문에 종단의 호응 세력이 많았다. 이때의 종정은 박한영 스님이었다. 박한영 스님은 호를 석전이라 했는데 석전과 만암은 추사가 지어 백파 스님에게 주면서 제자 중에 이 호를 쓸만한 스님이 있으면 주라고 해서 백파 스님이 두 스님에게 준 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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