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은 제34회 광복절|목숨던져 나라지킨 그뜻을 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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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충남예산군 "목발이"마을">
차령산맥줄기에 솟은 가야산과 산세 험한 원환봉에 둘러싸인 일명 「목발이」마을은 47년전인 l932년4윌29일 상해홍구공원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터뜨려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하고 전세계를 놀라게한 윤봉길의사의 고향이다.
예산읍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78년 4윌29일 의거 46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충의사를 비롯, 생가·전시관등이 마련돼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의 산표본이 되고있다.
민족정신의 마지막 보루라 하여 윤의사가 중도라 이름붙인 생가 광현당은 초가를 중심으로 3천평 웊데를 앞뒤로 큰 냇물이 둘러싸고 있다.
4세때까지 살던 광현당은 밀려드는 일제침략의 먹구름을 살신성인으로 지킨 애국정신의 산실이었다.
바로 곁에는 흙을 사랑했기에 민중을 사랑했고 민중사랑이 나라사랑으로 발전된 윤의사의 애국철학이 표현된 복흥원이 있다.

<농촌계몽의 터전 복흥원도>
무지 타파와 새로운 영농기술 보급을 위해 창립된 일진회와 체력단련을 위한 수암체육회, 농민보호를 위해 구성한 구매조합, 신용조합둥의 모체가된 복흥원은 윤의사 농촌사랑의 상징적인 실체였다.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학문과 사상을 닦으며 농촌개혁을 실천하던 거한당은 『나라를 건진다』는 뜻으로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곳이었다.
17세때 공동묘지에서 조상의 묘를 찾지 못하는 농촌청년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며 『농촌계몽만이 나라를 찾는 길』임을 역설한 윤의사. 『무지는 왜적보다 무섭다』며 가슴아픈 체험을 담은 「농민독본」은 바로 이같은 윤의사의 심오한 사상의 결정체였다.
뜻했던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때문에 윤의사는 어려서부터 친구들 사이에 실천가로 불렸다.
24세의 나이로 일본의 면전에 폭탄을 던져 기를 꺾은후 총검에 둘러싸여 연행되면서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끝내 당당하고 만족스런 얼굴을 했던 윤의사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다.

<유품시계 산화시간을 알려>
『짓밟힌 민족도 잔디처럼 일어난다』며 젊은 피를 일본의 천장절식전에 뿌린 그 의지는 47년이 지나고 광복34주년을 맞는 지금 충의사에서 생생히 되샅아나고 있다.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나는 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위해 몸바치겠읍니다.』
상해에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귀절이다. 전시관에 있는 유품 가운데 거사직전 백범 김구선생과 만나 서로 바꾸어 몸에 지녔던 회중시계는 충혼이 산화한 그 순간을 가리키고 있어 광복절 제34주년을 맞는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하고있다.

<체계화 안된 윤의사의 사상>
『오늘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하루속히 윤의사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후세에 전하고 그 충혼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이시찬씨(73)는 강조한다.
왜병의 손에 순국한 윤의사의 애국충정은 역사의 기륵과 함께 사저 제229호로 지정된 충남예산군덕산면임양리의 충의사에서 다시 꽃피우게된 것이다.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무궁화 삼천리 우리강산에/왜놈이 왜와서 왜걸대나/(중략)…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동천에 서색은 점점 밝아오는데/피끓는 청년제군들아 준비하세/군복입고 총메고 칼들며/군악나팔에 발맞추어 항진하세(하략) 』 가슴속에 용솟음치는 애국충정을 적은 이글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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