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나라 어디로 가나] 아직도 맴도는 "昌과 함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국회의원 1백51명. 대선에서 1천1백40만표를 얻은 정당.

그런 한나라당이 대선이 끝난 지 1백일이 지났지만 패배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회창(李會昌)전 총재가 정계를 은퇴한 뒤 사라진 리더십의 공간은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의원총회만 열리면 세대.노선.지역 간 갈등이 분출한다. 스스로 "우리 당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의원들도 보인다.

한나라당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한나라 소식'란을 클릭하면 이런 항목이 뜬다. '이회창과 함께'-.

이곳에는 대선 당시 李후보의 동정과 사진들이 실려 있다. 당보는 대선 후 발간이 중단된 상태다. '사이버 정책포럼'에는 "현재 진행 중인 포럼이 없습니다"라는 글만 띄워져 있다.

5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에 도전하는 주자들은 '창심'(昌心.이회창의 의중)을 파는 데 열중이다. "내가 당권을 잡아야 '이회창 사람들'의 공천을 보장할 수 있다" "李전총재는 내가 대표가 되길 바라고 있다"라는 식이다. 李전총재 사람들은 당내 최대 계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나라당의 시계는 이렇게 여전히 '이회창'에 머물러 있다.

대선 직후만 해도 한나라당에는 세대 교체.당 체질 개선 등의 구호가 범람했다. 그러나 당 개혁을 내걸고 출범한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은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밀려 누더기가 됐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바뀌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변해야 산다"는 주장뿐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상당수는 내각제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당 연찬회에서 처음 제기된 내각제 개헌론은 1월 4일 이규택(李揆澤)총무의 발언을 거쳐 지난 3일 하순봉(河舜鳳)최고위원의 국회 대표연설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 수도권 의원은 내각제 개헌론을 "대선 직후 당이 변해야 한다는 게 대세였다. 그러나 개혁 논의가 지지부진해지며 노무현 정권의 에러에 따른 반사이익을 챙기면서 생존을 모색하자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고 있다.

영남권.민정계 인사들이 주축이다. 이게 내각제 논의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의원은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전철을 밟자는 얘기"라고 자조섞인 평가를 했다.

아직도 한나라당 의원들은 삼삼오오 모이면 "이회창씨가 정계에 복귀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새로운 리더십 부재와 퇴행 현상은 한나라당의 원죄다. 한나라당은 잡다한 이념과 노선이 혼재된 정당이다. 집권당 시절 선거 승리를 위해 '누구라도 좋다'는 식의 마구잡이 영입이 이제 새 리더십을 세우는 데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뿌리는 신군부의 5공화국이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이다. 민정당은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구도를 깨기 위해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 3당합당(1990년)으로 민자당을 만들었다.

민자당이 만들어낸 YS(김영삼)정권은 15대 총선 승리를 노리고 수도권에 30, 40대 개혁세력을 공천했고 신한국당(95년)으로 이름을 바꿨다.

15대 총선을 거치며 당 간판으로 부상한 이회창 전 총재 역시 두번의 대선을 치르면서 통합민주당.자민련.새천년민주당 인사들을 받아들였다. 그 세력의 집합체가 97년 출범한 오늘의 한나라당이다.

그 결과 한나라당에는 한 때 급진세력으로 분류된 민중당.재야 출신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씨 등 군 출신 대통령들의 측근까지 망라돼 있다.

YS.이회창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이후 양측은 상대를 '수구' '급진'으로 서로를 공격하며 갈등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이 좀처럼 미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다.

나이와 학맥으로 얽힌 연고.서열 중심주의도 한나라당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대구의 경우 의원 11명 중 8명이 경북고 출신이다. 4선의 강재섭(姜在涉.55)의원이 고교 선배인 대구 의원들 모임에선 막내 취급을 받는다.

부산의 3선인 김형오(金炯旿)의원은 당 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지역의 선배 의원들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김부겸(金富謙)의원은 "당에는 복종과 연고의 문화가 썩은 물처럼 고여 있다"며 "젊은 의원들도 시간이 지나면 젖어들고 만다"고 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제1 야당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자신들을 밀어준 1천1백40만표를 대변하지도 못하고 있다.

박승희 기자

<사진 설명 전문>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나라당사. 건물 전면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사진=김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