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인상 후 시장의 표정|생필품 가게에만 「사재기」주부행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충격적인 유가와 전기요금의 대폭적인 인상이 발표된 다음날인 10일 낮의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의 표정은 차라리 한산했다. 지속적인 불경기 속에서 또 한차례의 유가인상으로 시장의 손님은 평소보다 더욱 줄었으나 고급「아파트」촌의「슈퍼마켓」은 눈치를 봐가며 생필품의 사재기를 위한 극성 주부들로 큰 혼잡을 이뤄 극심한 대조를 이루었다.
시장을 찾은 가정주부들도 아직은 물건값이 오르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인 앞으로의 물가인상「러시」속에 어떻게 가계를 꾸려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름 값 59%의 인상이라니요? 올라도 이건 너무 했어요. 어떻게 되어 가는 세상인지 모르겠어요.』 동대문 시장 앞에선「택시」 운전사까지 고개를 젓는다.
기름 값이 59%오르자 하루 1만월이면 족했던 연료비가 하루사이 껑충 1만 7천원으로 뛰어 하루수입액 중 기름 값과 회사입금액(2만원)을 빼면 이제 한달 수입이 종전 30만원 선에서 18만원도 힘들겠다는 푸념이다.
동대문시장 안에서 양장지 산매상을 하고 있는 김동환씨(32)는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0∼40%는 매기가 줄었습니다. 유가는 올랐지만 옷감 값은 워낙 매기가 없어 오히려 내려야 할 판입니다』고 복지업계의 심각한 불경기를 얘기한다.
올해의 여름장사는 끝났고, 유가의 가격인상은 8월 초순께부터 시장에 출하될 가을 복지 값에나 반영될 것이나 인상폭은 누구도 점칠 수 없다고 김씨는 말한다.
딸아이의 혼수용품 마련을 위해 시장에 나왔다는 50대의 한 가정주부는 강화 산 인조 옷감 30마 1필에 9천원, 꽃무늬「포플린」30마 1필을 1만 5천원에 샀는데 이는 한 달 전과 같은 값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3년째 동대문시장에서 수영복·수영모자 등 물놀이 용품 상을 하고 있는 한필녀씨(42)는 말했다. 『작년에 비해 제품 값은 10%가 올랐지만 워낙 팔리질 않으니까 밑지지만 않는다면 팔고 있습니다. 구색이 없어 못 팔던 작년의 3분의 1도 매기가 없어요. 게다가 가게 세 오르고 세금도 계속 올라 요즈음은 문을 닫는 집이 많아요. 견딜 재간이 없어요.』
계속되는 불경기로 오히려 값이 내려가는 품목 또한 없지 않다.
가정주부 이선례씨(60·도봉구 수유동) 는 『석달 전 1만 5천원에 샀던 50평 짜리 인삼을 오늘에는 1만 8백원을 주고 샀어요. 생필품이 아니면 안 팔리는 것 같더군요』라고 말했다.
회사원인 아들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씨는 한정된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느니 만큼 비교적 값이 싸고 질이 좋은 밑 반찬류를 사기 위해 거리는 멀지만 동대문 시장을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자꾸 물건값이 오르니 안 쓰고 아끼는 수밖에 없으니까 며느리에게도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됩니다.』시어머니의 고충을 얘기한다.
한편 남대문시장에서 식품소매점인 계동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서홍옥씨(46)는 물건값이 오른다고 해도 요즈음은 가수요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값이 오를 것은 분명하지만 주부들의 동태에는 큰 변화가 없어요.』
서민들의「쇼핑」장소인 시장이 평소보다 더욱 한산했던 반면 비교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집단 거주지인 반포·여의도·잠실 고급「아파트」지역 「슈퍼마켓」은 낮부터 사재기를 위한 주부들로 큰 혼잡을 이루었다.
가수요 품목은 세탁비누·합성세제·치약·휴지·설탕·조미료 등 지난 3월 첫 번 째 유가 인상이후 한바탕 품귀소동을 겪었던 생활필수품들. 『안사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주부들로 잠실 고층「아파트」안 「슈퍼마켓」은 저녁 6시가 되자 세탁비누와 합성세제는 1주일 치 재고가 바닥이 났다. 저녁 6시가 넘어도 계속주부들은 밀려들었다.
『선풍기는 값이 10%가 내렸어도 값만 물어보고 가는 손님이 대부분인데 이제는 전기 값 마저 크게 올랐으니 올해에 선풍기 팔기는 다 글렀다. 』시장 가전제품상들은 울상이다.
남대문시장 옷감가게 앞에서 만난 가정주부 양경희씨 (42·중구 신당동).
대학교수인 남편의 봉급으로 6자녀와의 살림을 꾸려가노라 물가파동이 나기 훨씬 전부터도 계획구매 등으로 절약생활을 몸에 익히며 살았다는 그에게도 이번의 유가인상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유행하는 옷에 눈감고 산지는 오래돼요. 가족의 건강과 직결된 식비마저도 고기와 생선은 되도록 줄이고 식용유를 많이 써서 영양과 가계부의 균형을 맞춰봤는데 정말이제부터는 어떻게 버텨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동안은 생필품값이 올라 생활비가 더욱 늘어갈 때마다 절약해가며 붓던 은행적금 등을 중단하고 모자라는 것을 메워 왔다는 그는 이 이상 더 물가가 오르면 버텨나갈 도리가 없겠다고 큰 한숨을 쉰다.
이제는 소비절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언가 부업거리를 찾아 가정수입을 늘리는 적극적인 생활자세를 가져야할 것 같다고 양씨는 말한다.
『그래도 그동안은 아끼고 아껴 은행저축을 하면서 집을 늘려보려는 소박한 꿈을 키워왔는데 이렇게 돈 가치가 형편없이 되고 보니 나만 손해보고 병신이 된 것 같아 속상합니다.』
아무리 국제정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유가인상 3개월만에 또다시 이처럼 대폭적인 인상을 하는 식의 행정은 제발 그만두어 국민이 정부를 믿고 긴 안목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양씨는 당국에 당부한다. <사회부·문화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