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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억 재산가 살해, 서울시의원이 시켰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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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한국에 들어오면 내가 죽는다. 거기서 죽든지 탈옥을 하든지 알아서 해라. 남은 가족은 내가 책임질게.”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중국 구치소 측에 손을 써 겨우 성사된 통화였다. 팽모(44)씨는 어떻게든 감옥에서 풀려날 방도를 상의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현역 서울시의원인 친구 김형식(44)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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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친구는 자신이 부탁해 벌어진 사건을 모른 체했다. 살인 혐의로 인터폴에 수배된 팽씨는 중국 선양에서 공안에 체포돼 구속된 상태였다. 그가 연루된 살인 사건은 사실 김씨가 청부한 것이었다. 팽씨는 한때 그 진실을 덮고자 운동화끈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죽으라”는 김씨의 말에 팽씨는 배신감을 느꼈다. 지난 5월 팽씨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인 사건의 진실을 꼭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팽씨와 김씨는 대구 지역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던 팽씨 형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2007년 김씨 역시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던 시절이다.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던 팽씨는 정치권에서 일하는 김씨를 동경했다. 2010년 김씨가 서울시의원(강서구 제2선거구)에 당선되자 팽씨는 주변에 자랑하곤 했다. “내 친구가 유명한 서울시의원인데 말이지….”

 1970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김씨는 팽씨에게 사업자금 7000만원을 선뜻 빌려주기도 했다. 2012년 말, 김씨는 팽씨를 경기도 부천의 한 식당으로 불러냈다.

 “내가 빌려준 7000만원 있잖아….”

 팽씨는 김씨가 불쑥 꺼내는 돈 얘기에 괜히 위축됐다. 아직 돈을 갚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김씨의 말이 놀라웠다.

 “그 돈 안 받을 테니까 송OO, 이 양반 좀 처리해 주라.”

 김씨는 “서울 강서구에서 대한항공 다음으로 세금을 많이 내는 3000억원대 재산가”라고 송씨를 설명했다. 하지만 팽씨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김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송OO 이 양반은 돈밖에 모르는 돈 벌레야. 내가 2010년부터 4번에 걸쳐 5억2000만원을 빌렸는데 돈 갚으라는 압박이 심해. 당장 안 갚으면 다음 지방선거에 못 나오게 하겠대. 그러니까 니가 이 양반 처리를 좀 해 주면….”

 그제야 얼마 전 김씨가 지나가는 말로 “요즘도 청부살인이 있나?”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팽씨는 엉겹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김씨가 송씨의 출·퇴근 시간과 동선, 주변인 동향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범행을 은폐할 수 있도록 폐쇄회로TV(CCTV) 위치까지 알려줬다.

 하지만 폭력 전과 하나 없는 팽씨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살해하는 건 어려웠다. 처음 1년간 팽씨는 송씨의 주변만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인천에서부터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송씨의 사무실까지 50여 번이나 찾아갔지만 범행을 실행하지 못했다. 김씨는 지난 1월 둔기와 차량에 있던 전기충격기를 팽씨에게 건네며 “더 이상 못 기다린다”며 다그쳤다.

 지난 3월 3일 0시40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S빌딩은 적막했다. 빌딩 화장실 한쪽에 숨어 있던 팽씨는 송씨가 3층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조용히 뒤를 밟다 덮쳤다. 이어 거친 몸싸움 끝에 팽씨는 송씨에게 둔기를 빼앗겼다. 다급해진 팽씨는 주머니에 있던 전기충격기를 송씨의 목에 들이댔다. 쿵-. 송씨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는 둔기로 쓰러진 송씨를 10여 차례 내리쳤다.

 이후 팽씨는 택시를 네 번이나 바꿔타며 60㎞를 도망쳤다. 그는 미리 옷을 숨겨둔 인천 옥련동의 한 사우나로 숨었다. 이후 1시간여 뒤인 3일 오전 2시45분쯤 사우나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인천 청량산으로 향했다. 증거를 불태우기 위해서였다. 팽씨는 사건 사흘 뒤인 6일 선양으로 도피했다. 김씨가 “선거 끝날 때까지 잠시 중국에 가 있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범행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도피자금 250만원을 팽씨 지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출국 전날인 5일 공항 인근까지 팽씨를 차로 태워다 준 것도 김씨였다.

 경찰은 택시 GPS 등을 추적해 지난 3월18일 팽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중국 공안과 공조해 지난달 22일 팽씨를 선양에서 붙잡았다. 그 사이 김씨는 6·4 지방선거에서 시의원 재선에 성공했다. 강서경찰서 강력팀은 지난 24일 오후 선양에서 팽씨를 인도받아 국내로 압송했다. 같은 날 김씨도 체포됐다. 그는 “팽씨가 돈을 훔치기 위해 송씨를 살해했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은 범행 전후 대포폰과 공중전화 통화 내역 등을 증거로 김씨를 구속했다.

 팽씨는 선양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윤경희 강력2팀장을 처음 보곤 울면서 “죄송하다”고 했다고 한다. 이날 윤 팀장 휴대전화에는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자신의 남편에게 꼭 보여달라며 팽씨 부인이 보낸 문자였다. ‘ 사실대로 얘기해 … 죽지말고 살아. ’

※이 기사는 경찰 설명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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