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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어디 갔나, 한국판 산업혁신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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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달 17일 프랑스 엘리제궁. 미야나가 슌이치(宮永俊一) 미쓰비시중공업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알스톰의 에너지사업 부문을 지멘스와 공동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31억 유로(약 4조2800억원)를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미쓰비시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알스톰 인수전에서 결국 패했지만 글로벌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선 거금을 동원할 수 있는 큰손으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GE와 독일의 지멘스를 추격하겠다며 히타치제작소와 함께 ‘미쓰비시히타치 파워시스템(MHPS)’을 세우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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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비시가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 발을 들이밀 수 있었던 데엔 일본 정부의 지원이 숨어 있다. 1999년 일본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이란 장기침체를 끝내기 위해 기업의 구조조정과 투자가 절실했다. 그런 일본 정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 바로 3년 한시 특별법인 ‘산업활력법’이다.

 상법·민법·공정거래법 등 모든 법을 한번에 아울러 신청해도 1개월 만에 승인해줘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투자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부실 기업, 정상 기업,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 이 법을 통하면 빠른 구조조정과 M&A, 합작투자 등이 가능했다. 미쓰비시는 이 법 시행 첫해 자동차 사업 조정을 했다. 이후 산업활력법은 아베 정부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이란 이름으로 15년째 이어졌다. 미쓰비시는 이 법을 통해 총 여덟 번의 사업 조정을 거쳐 현재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속전속결식’ 친기업 정책인 산업활력법은 마법처럼 어깨가 처져 있던 일본 재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세계 2위의 신일본제철도 이 법을 통해 2003년 화학 분야를 완전 자회사로 넣었고 스미토모금속과 공동사업을 시작해 2012년엔 아예 스미토모금속을 합병해 경쟁력을 높였다. 도요타는 2000년 자동차 금융 회사를 설립하면서 이 법을 활용했고 해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자금지원을 받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2010년까지 이 법을 통해 총 542건의 일본 기업의 사업 재편이 이뤄졌다. 특히 혜택을 받은 기업의 48%가 중소·중견기업이었다. 김용춘 전국경제인연합회 커뮤니케이션팀장은 “과소투자, 과잉규제, 과당경쟁으로 침체됐던 일본 경제의 체질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패키지’ 형식으로 기업의 투자를 촉진시켰던 산업활력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올 1월부터 6월까지 세계 기업 M&A 시장은 1조75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5% 커졌다. 체질 개선에 성공한 일본 기업들은 급팽창하고 있는 해외 M&A시장에서도 공격적이지만 우리 기업들의 해외 M&A 소식은 전무하다. <6월 12일자 A1·4·5면>

KOTRA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은 2012년 515건, 2013년 499건의 해외 M&A를 했다. 2012년이 사상 최고치였던 점을 감안하면 사상 두 번째로 해외 기업을 많이 사들인 셈이다. 조선과 해운, 건설업 등 불황업종이 늘어나자 정부는 일본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을 본뜬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권 교체와 함께 공무원들의 서랍 속에서 3년째 잠자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일본을 벤치마킹해 우리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 기업들의 선(先) 구조조정을 돕고 법인세 등의 세 부담, 자금조달 부담을 줄이는 것이 골자였다. 상법과 공정거래법상 절차를 간소화해 ‘승인’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기로 했지만 정작 당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주무를 맡아 법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회사법은 법무부가, 공정거래법은 공정거래위원회 소관이어서 ‘특례’를 두는 데 대한 부처 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당시 법안 추진에 참여한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각 부처가 소극적인 데다 주무부서였던 지경부의 담당자가 교체되고 정권이 바뀌면서 법안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은 15년이란 시간 동안 이 법의 용도를 사업재편→친환경 사업 장려→규제개혁에 이르도록 활용하고 있다”며 “우리도 한시적으로라도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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