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32)<제64화>명동성당|노기남(22)|교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신학교의 방학은 1년에 한번, 6윌15일에 시작해서 9월까지의 3개월간이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첫 방학을 맞이했다. 수도원 이상으로 엄격한 교내생활에 얽매였던 학생들은 방학을 앞두고 10여일 전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자리에 눕혀도 생각은 고향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잠이 오지를 않는다. 나는 이미 20여일 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워 출발일자를 알려 드렸다.
그러나 방학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대체로 6월15일을 전후해서「예수」성림 축일이 드는데 이해에는 6월l7일이 그 축일이었고 학교에서 이 축일행사를 치르느라 방학이 늦어진 것이다.
방학 전날 우리들은 교번순서에 따라 경리신부한테 가 귀향경비를 탔다.
경리신부는 각자의 고향까지의 노자를 계산해 주고 미투리 한 켤레씩을 주었다. 이날 밤 우리 동기생들이 쓰던 기숙사의 4개방은 밤늦도록 웅 성됐다.
「기낭」신부가 두 차례나 방을 돌며 취침시간을 지키라고 경고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일의 귀향을 앞두고 모두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나에게는 이 첫 방학이 슬픈 귀향이었다. 나는 부친 상중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께 부탁해서 휜 무명두루마기를 준비하고 교 모인 검은「개떡모자」(베레모)대신 흰 모자도 마련했다. 이 모자는「기낭」교장이 따로 사오 게 한 것이다.
당시 신학생들의 옷차림은 일반 사회인들이 보기에는 적잖이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들 자신이 보기에도 그랬다.
내가 입학했을 당시의 제복은「프랑스」군복 모양의 엷은 물빛 상의였다. 우리는 이 상의를 한복 바지저고리 위에 입고 허리께 에는 검은색 가죽「벨트」를 둘렀다.
머리에는 모 표도 없는 검은색 개떡모자를 쓰고 검은색 구두까지 신었으니「짚신 신고 넥타이 맨」꼴이 되었고「전 중이 옷」(죄수복)이란 말도 나올 만 했다.
결국은 3·1운동 뒤 이 교복은 학생들의 항의도 있고 해서 검은 두루마기로 바뀌었으나 신학교 제복은 심심찮게 말썽을 낳기도 했다.
목요휴일에 우리가 단체로 길을 가노라면 길거리의 어린이들이「삘루기」(까마귀)라 놀려대며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애교로 받아 줄 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야유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우리는 주일 오후 가끔 효 창원(지금의 효창공원)에 산책을 나오는 수가 있었다. 지금의 숙 대 앞으로 오르는 길은 당시의 일본인 촌인데 그 길을 갈 때의 일본인들의 놀림이 학생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곤 했다. 그날도 우리는 심「폴리」신부의 인솔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일본인 어린이들의 놀림은 더 심했고 심지어는 과실 껍데기까지를 우리에게 던졌다.
참다 못한 학생 한 명이 뛰어나갔다. 그 때까지 묵묵히 우리를 인솔했던 심 신부는 그 학생을 제지시키면서 우리들보고는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심 신부는 일본인 어린이들을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 같았다. 그때 일본인 청년 두 명이 어디서 나타나더니 심 신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심 신부는 이거야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청년 두 명을 길바닥에다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심한 발길질을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성직자가 보인 의외의 완력을 보고 아연해 했고 청년들은 저항해 볼 수가 없었던지 슬금슬금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저만큼 앞서 가 있던 우리는 쾌재를 불렀고 이 일은 하나의「쾌 사」로 신학교의 이야기 거리로 오래 남게 되었다.
심 신부는 1차 대전 때 참전을 했던「프랑스」보병의 장교출신이었다. 그는 매우 의협심이 강했다. 그만이 아니고「프랑스」신부들은 인종이나 인격적 차별을 보고는 언제나 분개를 했고 일본인들의 한국인 모욕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고향을 떠 난지 9개월만에 흰「베레」모 흰 두루마기, 미투리 차림을 한 나는 생후 두 번째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부선생들은 남대문 정거장(서울역)까지 우리를 데려다가 기차에 태워 까지 주었다.
집에는 방학이 이틀이나 늦어진 줄도 모르고 이틀동안이나 동구 밖에서 나를 기다리시다가 지쳐 버린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다음날 나는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유명을 달리한 부자의 상봉이 아들에게는 그토록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방학동안은 형님과 함께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비오는 날이면 미투리를 삼기도 했다. 어머니는 신학생이 된 아들을 몹시 대견스러워 했고 매우 만족해 하셨다. 이 어머니의 만족해하시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뒷날 신학교의 고된 과정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솜바지 저고리와 한 보따리 떡을 싸 짊어지고 학교에 돌아온 것은 개학 전날이었다. 오랜만에 학우들을 만나니 반가 왔으며 각자가 가지고 온 음식을 취침시간 뒤 신부선생들 몰래 나눠 먹는 맛은 어디다 비길 수가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