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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꽃향기 벗 삼아 '왕의 길' 걸었죠, '생기 돋는 내 모습'이 보이네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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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1 힐링 여정 참가자들이 기림사 삼천불전 앞에서 걷기 명상을 하고 있다. 땅을 디딜 때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잡념을 비워내는 과정이다. 2 신문왕 호국행차길의 숨겨진 비경 ‘용연폭포’. 3 ‘동해의 꽃’으로 불리는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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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 모였다. 몇 년 전 ‘오래 살아봤자 한 달’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암 경험자, 남편과의 불화로 화병이 난 주부, 잦은 입원에 이골이 난 자가면역질환자 ….

이들이 모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지친 심신의 ‘힐링(healing·치유)’을 위해서였다. 중앙일보는 지방자치단체와 공동으로 전국에 숨어 있는 힐링 명소를 발굴해 소개하는 ‘대한민국 힐링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힐링마을 3호는 경상북도 경주다. 경주는 신라의 역사문화유적지로만 부각됐지만 알고 보면 곳곳에 힐링 요소가 가득하다. 지난 19~20일 치유를 원하는 8명의 참가자와 강동경희대병원 화병스트레스클리닉 정선용(한방신경정신과) 교수가

경주로 ‘힐링 여정’을 다녀왔다. 이들에게 주어진 힐링 처방은 ‘명상’이다. ‘왕의 길’과 ‘파도소리 길’에서 진행된 그들의 치유 여정을 따라가 본다.

“우와, 경주에 이렇게 고즈넉한 절이 있었네.” 경주시내에서 한참을 이동해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기림사에 도착했다. 15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기림사는 경주의 대표 사찰로 꼽히는 불국사와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법당과 숲, 드넓은 하늘뿐이다. 마치 속세와 단절돼 자연 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경주시보건소 힐링시티계 박정희 주무관은 “기림사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의 발길이 드물고 고즈넉하다”며 “북적거리는 관광지가 지겹거나 관광객에 치이기 싫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힐링 장소”라고 소개했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에서 진행된 좌선명상.

사람 때 묻지 않은 ‘신문왕 호국행차길’

기림사에 짐을 푼 일행은 ‘신문왕 호국행차길’로 향했다. 함월산 기슭을 타고 넘는 트레킹 코스로 일명 ‘왕의 길’이라 불린다. 신문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문무대왕릉까지 행차했던 숲 속 길이다. 전체 코스는 기림사에서 모차골까지 편도로 약 4㎞. 이곳에서 첫 힐링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바로 ‘걷기 명상’이다. 정선용 교수는 “보통 명상이라고 하면 앉아서 눈 감고 가만히 있는 좌선을 생각하지만 걸으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발바닥이 어딜 내딛는지, 발이 땅을 밀 때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온 정신을 기울여야 한다. 한 걸음을 걷는 데도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지금 여기’예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내가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죠. 대개 지나간 일,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요.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막힌 기가 풀립니다.” 정 교수의 지도로 호흡에 발걸음을 맞춰 걷는 호흡걷기명상, 앉아서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는 좌선명상, 누워서 하는 와선명상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참가자들 사이로 새소리·계곡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꽃·나무 향 등 오감을 자극하는 자연 그대로가 전해졌다.

 명상과 트레킹을 반복하며 ‘왕의 길’을 걷는 사이 숨겨진 비경 ‘용연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참가자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내질렀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와 투명한 계곡물이 절경을 이뤘다. 신문왕이 옥대(옥으로 장식한 허리띠)의 장식 하나를 떼어 물에 던지자 용이 돼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박정희 주무관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사람 때가 묻지 않아 조용히 명상하며 걸을 수 있다”며 “용연폭포는 물론, 야생화·다람쥐·산딸기 등 자연을 있는 그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암 경험자와 화병 환자, 아픔 공유하며 치유

기림사에서 이어진 템플스테이. 화정당에 모인 참가자들이 이번 여정의 핵심인 ‘힐링’을 주제로 자신을 돌아봤다. “몇 년 전 심하게 아팠을 땐 괜히 남편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원망이 가득했죠. 억울해서 밤에 잠도 안 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가 남편을 너무 괴롭히지 않았나’ 반성하게 돼요. 오늘 이 자리는 저한테 매우 값진 힐링 그 자체네요”(김정숙·61·여), “4년 전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몇 날 며칠 한없이 울었죠.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병이 생겼나 싶었어요. 그래도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그게 저한테는 ‘명약’ 같아요”(황성화·70·여), “큰 병을 앓고 나니 삶의 의욕도 떨어지고 남들 앞에서 자신감이 없어져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죠. 그동안 ‘힐링’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오늘 깨달았네요. 마음을 비우고 잡념을 버리면 편안해진다는 걸”(강상훈·가명·60대). 아팠던 경험을 나누며 참가자들은 함께 웃고 울었다. 정 교수는 “아픈 사람의 처지는 아픈 사람이 가장 잘 안다. 그 경험을 공유하며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상당한 위로와 치유가 된다”고 말했다.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에서 파도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명상에 집중하는 참가자들.

부채꼴 모양 주상절리, 파도소리는 배경음악

이튿날 오전, 기림사 현천 스님과의 차담으로 일정이 시작됐다. 따뜻한 차 한 잔씩 따르고 스님은 “뭐든 질문해 보라”고 말했다. 40대 주부가 “남편 때문에 화병이 났다”며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질까요”라고 물었다. 스님의 마음 처방전이 이어졌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아요. 밥도 모자란 듯 먹어야 속이 편하듯 자기가 조금 손해본다는 심정으로 비우고 살아야 마음이 편해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더 잘해 주는 것이죠. 이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남편 데리고 절에 한번 찾아 오세요.”

 이번 힐링 여정의 마지막 힐링 코스는 경주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 서울에서 온 이들은 “경주에도 이렇게 예쁜 해변이 있었나?”라는 신기함을 나타냈다. 구간별로 몽돌길·야생화길·등대길·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조성돼 트레킹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다. 이곳 해변에는 독특하게도 주상절리가 모여 있다.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냉각되면서 생긴 것이다. 특히 이곳의 주상절리는 희귀한 부채꼴 모양으로 흔히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모습이 곱게 핀 한 송이 해국처럼 보인다고 해서 ‘동해의 꽃’으로 불린다. 자연이 연출한 조각품을 눈에 담고 파도소리 길에서 명상이 이어졌다.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 바람이 얼굴에 닿는 느낌, 바다 냄새 등 오감에 집중하고 파도소리에 맞춰 호흡했다.

 이렇게 이틀간의 여정을 마친 이들은 과연 힐링이 됐을까. 설문조사 결과 참가자 모두가 ‘매우 만족’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송지영(39·여)씨는 “이틀간의 시간이 매우 감동스럽고 꿈만 같았다”고, 60대 윤창록씨는 “1박2일은 시간이 짧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김정숙(61·여)씨는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과 함께한 정 교수는 “일상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수 있다”며 “힐링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경주시는 앞으로도 힐링 여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경주시보건소 김미경 소장은 “1500년 전 신라인의 숨결이 담긴 경주에는 도심에서 맛볼 수 없는 편안함이 흐르고, 낭만과 여유가 가득하다”며 “이번 힐링 여정을 시작으로 경주가 치유의 도시, 다시 오고 싶은 힐링의 메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오경아 기자 ,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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