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사라예보와 7월 위기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어제로 100년을 맞았다. 1914년 6월 28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실마리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사건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날이다. 장소는 당시 시청사 근처에 있는 라틴 다리 앞의 도로상이다. 암살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세르비아 군부가 무기를 대준 게 드러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 7월 28일이 전쟁의 시작이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19074라는 일련번호가 적힌 38구경 브라우닝 1910 권총으로 발사한 두 발의 총알이 부부의 목숨을 앗아 갔다. 단독 거사는 아니었다. 암살조는 모두 6명이었다.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암살조에는 무슬림도 1명 있었다는 점이다.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쉬치라는 인물이다. 사건 직후 피신해 체포와 재판을 피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보스니아를 점령한 친나치 크로아티아의 민병대인 유스타시에 의해 1943년 5월 살해됐다. 보스니아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보스니아인, 동방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인 크로아티아계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남슬라브족으로 분류되는 세 종족은 종교와 정체성만 다르지 언어는 동일하다.

프린치프를 비롯한 암살 관련자들은 그해 10월 벌어진 재판에서 자신들이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라고 밝혔다. 발칸반도에 있는 남슬라브족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자는 게 그들의 이상이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증언은 무시됐고 세르비아 군부가 무기를 지원했다는 사실만 강조됐다. 무슬림까지 암살에 가담했는데도 사건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발로로 치부됐다.

재판에서 17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주동자 다닐로 일리치를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리치를 비롯한 3명은 1915년 2월 3일 처형됐으나 나머지 2명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세프 황제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암살을 기획한 일리치는 교사 출신의 기자로 당시 세르비아계의 지식인이었다. 생일이 7월 25일인 프린치프는 사건 당시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사형 대신 20년 형을 받았다. 하지만 보헤미아의 감옥에서 1918년 4월 28일 폐결핵으로 숨졌다.

암살사건이 알려지자 사라예보에서 무슬림 폭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흔히 무시된다. 보호령이던 보스니아를 1908년 합병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대한 폭동이 아니었다. 폭동의 대상은 세르비아계였다. 사건 당일 2명의 세르비아계 시민이 암살범과 같은 세르비아계라는 이유로 거리에서 피살됐다. 세르비아계 가게는 약탈당하고 소유 건물은 불탔다. 피해가 1000건이 넘었다. 백주의 인종 테러가 아닐 수 없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출신으로 1961년 유고슬라비아 국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1892~1975)는 “당시 사라예보는 증오로 가득 찼다”고 기록했다. 사라예보뿐 아니라 보스니아 전역에서 5500명의 세르비아인을 이유 없이 구금했으며 이 중 700~2200명이 감옥에서 숨졌다. 460명의 세르비아계가 인민재판으로 처형됐다. 세르비아계를 처형하기 위해 무슬림으로 이뤄진 특수부대도 조직됐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10개 조의 요구안을 보내 수용과 전쟁 중 택일을 강요했다. 세르비아는 8개를 받아들이고 국제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부됐다. 암살에서 선전포고까지 한 달간 외교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있었다. 역사는 이를 ‘7월 위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끝내 광기가 이성을 눌렀다. 그 결과는 비극과 참화였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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