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건물의 고층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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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금년초 박정희 대통령은 『너무 잦은 도시계획 변경은 국민에게 피해를 주고 예산을 낭비하게 된다』고 지적, 도시계획의 신중한 입안을 지시한 바 있지만, 이 분야에 있어서의 행정 낙후성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듯한 인상이 없지 않다.
적법 절차에 따른 허가를 받아서 지은 건물이 허가를 해준 바로 그 관청에 의해 얼마 후엔 철거대상 건물이 되는가하면, 지하도와 같은 단순한 공익시설에 대해서도 몇 년간에 몇 번씩 변경공사를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체험이 되고 있다.
도시계획의 이 같은 잦은 변경과 시행착오는 간단히 말해 미숙한 도시행정에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인구·교통·주변환경의 기능 등에 대한 예측과 수요판단이 서투르고, 일정한 「룰」이 없이 그때 그때의 필요성에 따라 즉흥적으로 임기응변적 행정을 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의 고층건물 층수제한방침 역시 원칙 없는 행정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서울시는 서울 4대문 안의 간선 도로변에는 15층 이하로, 같은 지역 안의 간선도로선이 아닌 곳에는 12층 이하로 건물층수를 규제하겠다고 발표, 다만 그전에 허가를 받아 공사중인 20층 이상 건물에 대해서는 허가내용대로 공사를 하도록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일 후인 지난 15일에는 그 전에 허가하여 공사가 진행중인 2O층 이상 고층건물에 대해서까지도 이를 2O층 이하로 낮추도록 건물주에게 종용했다고 한다.
이 중 한 「빌딩」의 경우 국보 1호인 남대문 옆에 세워지므로 경관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건물을 허가해줄 당시에는 주변에 남대문이 있음을 몰랐다는 것인가.
이처럼 허가를 하고서도 사후 변경을 예사처럼 뒤풀이하는 것은 허가해준 행정조치가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며, 이미 20층 이상의 골조 공사를 마친 건물에 대해서는 일부 재공사를 불가피하게 하는 낭비와 피해를 강요하는 결과가 됐다.
이것은 무원칙한 도시계획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도시 계획의 잦은 변경으로 인한 시민의 출혈과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과밀한 도심의 교통혼잡을 막고 적정한 주변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도심 건물에 대한 규제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그 규제도 일정한 기준과 객관성을 가지는 합리적인 것이 돼야함은 물론이다.
서울과 같은 다원적이고 개방적인도시가 간선도로변에 획일적으로 15층 짜리 건물만을 가지는 것이 「도시미관」에 꼭 도움이 될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도대체 건물을 층수로만 규제한다는 발상에도 얼핏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공간을 갖고 주변도로망이 잘 완비된 20층 이상 건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20층 이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통량 집중을 초래한다는 논법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특히 재개발지구의 경우 충분한 공간과 녹지를 갖추게 함으로써 교통 혼잡을 막고, 쾌적한 환경여건과 기능성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건물의 고층화를 택하는 경향이 세계적 추세라는 것을 어찌 외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따라서 고층건물은 규제하되 주변여건과 용적율, 건물의 기능, 교통집중 효과와 소통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 선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좀더 신중한 판단이 있어야할 것이다.
우리는 뭣보다도 도시계획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조령모개식인 시행착오가 더 이상 없기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강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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